[해당화→코레 A. 아마란테] 당신을 향해 가는 시간

커뮤/코레 A. 아마란테 2020. 8. 26.

BGM: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 새벽녘


당신을 향해 가는 시간





(*개연성을 위해 날조한 서사가 많이 있습니다.) 




  •  생일 축하해요.


  •  여긴 아직 전날 17시인데요?


  •  여긴 0시니까? 


  •  그래도 난 여기 있는걸요.


  •  조금만 기다려요. 얼른 날아갈게. 


  •  응, 기다릴게요. 


메신저를 끄려다가 당신의 프로필 사진을 터치해서 확대한다. 디지털 월드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당신이 찍은 사진은 디지바이스가 파괴되면서 당신의 핸드폰과 함께 사라졌지만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놓았던 덕분에 이 사진을 남겨서 당신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천운이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뻣뻣하게 굳은 자신과 비교적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당신. 조금 부끄럽지만 소중한 추억이니까. 사진 속 당신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애틋한 미소를 짓는다. 안내 방송이 나와 핸드폰을 집어넣는다. 안전벨트를 잘 채웠는지 확인하고 동그란 창 밖으로 활주로 유도등이 깜빡이는 것을 지켜본다. 엔진 소리가 커지는 만큼 심장도 조금씩 빠르게 뛴다. 이윽고 몸이 떠오르는 감각은 데미우르고스 위에 서서 디지털 월드로 전송되던 순간과 얼추 비슷한 감각이다. 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로 떠난다는 점에선 똑같을까. 문득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고 비즈니스석 시트에 몸을 묻는다. 


오월 중순. 디지털 월드를 구하고 리얼 월드로 돌아온 프로젝트 아브락사스의 대원들은 가장 먼저 브리엘이 그렇게도 노래를 불렀던 파티를 벌였다. 크로셀의 별장이 아니라 본부 한가운데에 캠프파이어를 만든 건 아쉬운 점이었지만 조촐한 파티는 모두에게 충분히 즐거웠다. 아무도 훼방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돌아온 영웅들이었고, 본부의 모든 직원들도 그들이 지루한 축하연을 겨우겨우 견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임무에 대한 보고를 비롯해 후속 조치가 모두 끝나는 데만 한 달 가까이 걸렸다. 부쩍 따뜻해진 공기를 코끝으로 느끼며 대원들은 각자 고향으로 흩어졌다. 공항에 모여 메일과 연락처를 다시 한 번 교환하고(태반이 디지털 월드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린 탓에) 서로를 껴안으며 앞으로의 무운을 빌었다. 링고, 스미레, 재호를 비롯한 도쿄 출신들이 가장 먼저 공항을 떠났다. 그 후 일본 각지에 사는 아라카시키, 요나, 아즈사, 요우카가 국내선 터미널로 갔다. 다음으로 영국으로 가는 갤러해드와 크로셀, 다니엘과 알렉세이, 레오넬. 그 다음으로 미국 각지로 가는 로자와 틸리, 케니스. 이어서 코스타리카로 가는 사오, 호주로 가는 알버스, 캐나다로 브리엘, 프랑스로 루이, 인천으로 희철, 새난슬, 린다… 한 명씩, 두 명씩, 각자의 출국장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그와 당신은 가장 마지막까지 공항에 남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조금 후에 그는 김해로, 당신은 두바이를 경유해서 아테네로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이제 막 알게 된 연인들이었다. 이제부터 당신과 근 두 달을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그는 차라리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조차도 제멋대로 다룰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시간이고, 당신이 떠날 때는 결국 왔다. 두 사람은 다음이 없을 것처럼 긴 키스를 했다. 쉽사리 놓을 수 없었던 손이 미련으로 가득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영영 못 볼 것도 아니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마지막까지 웃어주었던가. 당신이 게이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도 그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발걸음을 돌렸다간 아직도 품 안에 남아있는 온기가 흩어져버릴 것만 같아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시절 여름방학이면 이렇게 헤어지는 게 당연했고, 가슴을 콕콕 찌르는 아쉬움에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웃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얼어붙는 것처럼 아파와 견딜 수가 없었다. 새삼 그는 자신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당신의 따스함에 얼마나 깊이 기대고 있는지를 온 몸으로 느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까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그 정도는 어른이었다. 주먹을 꼭 쥐고, 다시 만날 순간의 기쁨을 고대하며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유지인 아부다비에 도착하자 시계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킨다.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아직 네 시간 가량 남아 있다. 입국장을 나와 중동의 공항답게 호화롭기 그지없는 비즈니스 라운지에 다다른다. 기내식은 만족할 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고(더군다나 야간비행이었기 때문에 메뉴는 시원찮았다) 저 편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는 먼저 와이파이를 찾아 메신저를 켠다. 혹여 당신이 무슨 말을 더 남겨두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에. 


새로 온 메시지는 없다. 경유지에 도착했다고 보고하려다가 시간을 계산해 본다. 그리스는 새벽 세 시. 메시지를 보내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다. 어쩌면 당신도 이처럼 애타는 가슴에 잠 못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지만… 아니,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러길 바라는 거다. 그러니 무슨 말이라도 더 보냈을 거란 기대를 하는 거고. 정말이지, 나란 놈은 사랑 앞에 어디까지 유치해질 작정인 걸까? 쓰게 웃으면서 메신저를 끈다. 그는 제 가슴 속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허기와는 다른, 오직 당신의 존재로만 채울 수 있는 공허함이다. 통유리창 너머 하늘이 파랗게 물들어 느긋하게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식욕은 어느새 사라져 있다. 두 달을 참아내고 앞으로 몇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데도 느리게 흘러가는 이 시간이 야속하다.


유월 초의 고향 바다는 지금 보고 있는 저 하늘처럼 짙푸른 색이었다.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한 그는 가장 먼저 바다 사진을 찍어 당신에게 보냈다. 두 번째로 할아버지의 유골함을 파내어 유골을 섬 앞바다에 흩뿌렸다. 묻은 지 올해로 이 년이었고 은근한 유교 사상이 기저에 남아있던 할아버지는 아마 삼 년을 꽉 채워주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소원을 들어줄 의향도 이유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보호자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했고 그의 망가진 유년기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었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라도 복수가 하고 싶었다. 유골을 뿌리는 행위부터가 명복을 빌기 위함인데 이런 사소한 복수에 어떤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럼에도 가슴이 조금 후련해졌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섬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섬의 모든 곳에 남아있는 지난한 삶의 흔적을 되짚어본 뒤, 무너져가는 집 마루에 무릎을 세워 앉고 바다를 눈에 담았다. 이곳에 이 자세로 앉아 느꼈던 모든 고독과 고통을 고요한 마음으로 관조하며 문득 사 년 전 당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그의 마음이 거친 파도에 깎이고 마모되기 전에 당신이 보듬어줄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어땠을까? 그는 상상했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으로 어린 내가 당신과 만났더라면 괴로웠던 과거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을까? …얼마나 의미없는 가정이냐고 그는 바로 생각했다. 일어날 수 없었다고 단정지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당신이 나에게 와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는데… 당신이 보듬어준 지금의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 끊어버린 과거를 곱씹고 있는데.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면, 하는 가정은 배부른 소리 같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다. 일어나 배를 타고 섬을 떠났다. 더는 이 섬에 미련도 못다한 일도 없었다.  


해가 뜨자 그는 라운지 안쪽으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에 몸을 적시며 한 친구에 대해 떠올린다. 앙브루아즈 디디에 아데스-줄여서 루이. 프로젝트 동료이자 프랑스 파리 출신의 보석 세공사. 아부다비 대신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을 경유지로 골라 루이를 먼저 찾아갈 계획도 세웠었지만, 그는 지금 연락조차 받지 못할 만큼 바쁠 것이다. 거대한 르 아데스의 수석 디자이너로서 여행을 사랑하는 그 자유로운 영혼도 소임을 다해야 할 때가 있기에. 친구 생각을 하자 차갑던 가슴 속에 조금 훈훈한 기운이 돈다. 루이는 언제나 그와 당신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반지나 보석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함께 찾아오라는 말을 한 적도 있고(어떤 의미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페르세포네의 또 다른 이름인 당신에겐 이제 봄을 찾아 날아가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했던가. 아데스, 혹은 하데스Hades라는 성에 어울리는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루이를 비롯해, 두 사람에게 쏟아졌던 동료들의 축복은 그로 하여금 당신과 함께하는 미래에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한다. 그에게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걱정 역시 많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당신에게 모자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 지우지 못한 채다. 어쩌면 이제 겨우 스물둘, 스물인 두 사람은 영원을 약속하기엔 어리고 성급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신뢰하는 동료들의 응원과 축복엔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사그라들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어떤 파도도 함께 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게 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자 깊은 공허함도 점점 사그라들고 다시 식욕이 돌기 시작한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샤워실을 나선다. 


할아버지와 집과 관련한 자잘한 일처리를 마치고 나서 작은 방을 구했다. 출국하기 전까지 한 달 반 남짓 머무를 곳이었다.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과 식사를 했고, 커피를 마시며 친구들이 보내온 메일에 답장을 했다. 오후에는 책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해 이것저것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해가 지면 근처 바다에 가서 물에 쉬라몬을 풀어준 후 해변을 거닐며 산책을 했다. 그러다 아홉 시가 되면 모래톱에 앉아 오후 두 시의 당신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는 짧게 끝날 때도 몇 시간씩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지만, 그만큼 통화를 마칠 때면 깊은 슬픔으로 가슴이 저려 왔다. 돌아와 자리에 누워 당신과 찍은 사진을 하염없이 보다가, 깜빡 잠이 들어 당신이 나오는 좋은 꿈을 꾸는 매일의 연속이었다. 


일과 사이 남는 시간은 당신이 디지털 월드에서 잃어버린 조각상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데 온전히 쏟았다. 눈물을 보일 정도로 기뻐하던 모습도, 잃어버렸을 때의 허탈해하던 모습도 그는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기만 하는 그리움을 칼끝에 담아 수천 번, 수만 번 나무 조각을 깎아냈고, 애절한 마음은 그럼에도 흘러넘쳐 한 번은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가는 조각상 앞에서 눈물을 떨군 적도 있었다. 정성을 다하는 만큼 시간은 느리게나마 흘러, 파트너 자스민과 손을 잡고 정답게 걸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완성했을 때쯤엔 다시 한 달이 지나 비로소 팔월이었다. 


탑승구로 들어가며 그는 뒤편에서 들려온 익숙한 고향의 말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젊은 한국인 부부 사이에 여덟 살 남짓 되어보이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부모의 손을 한 쪽씩 잡고 걸어간다. 아이는 부모에게 아테네는 어떤 곳이냐며 눈을 반짝이며 묻고, 부모는 그런 아이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정다운 가족에게 한 번씩 미소를 지어주며 지나간다. 그 역시 미소지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한다.


조각을 완성한 날 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 년만이었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작년 이맘때 온 적 있는 호텔 커피숍에 들어서자 똑같은 자리에 그들이 앉아있었다. 변한 것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그는 그 때 얼마나 슬펐고 화가 났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이번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체구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 그들의 인삿말은 걱정이었다. 그는 괜찮다고 짧고 단호하게 걱정을 물리친 후 침착한 목소리로 용건을 정했다. 일 년 동안 많이 고민했지만 여전히 당신들을 용서하고 부모로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고. 앞으로도 아주 오래 그럴 거라고. 가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도는 전해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기대하지 말라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미래를 함께할 생각으로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고, 머지않아 그 사람과 함께 외국에서 살 계획이라고도 말했다. 마지막 말을 들은 그들의 표정은 상상했던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애초에 커피를 시킬 생각조차 없었던 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가, 결국 한 마디를 더 했다. 당신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다 지나가고 난 지금은 태어나게 해 준 것만은 감사하고 있다고. 


좌석에 앉아 그는 깊은 숨을 내쉬어 가슴 속에 고여 있던 답답한 공기를 내보낸다. 마지막 말을 덧붙인 건 잘 한 일이야. 등 뒤에서 들려왔던, 조금은 안도한 것만 같던 울음 소리를 떠올리고 속으로 되뇌인다. 그들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그렇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고통을 어깨에 지우고 싶진 않다.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도 사실이고, 그들이 속죄하며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낸 여생을 살았으면 한다는 마음도 사실이다. 그러니 중도와 같은 이 선택이 옳다고 다시 한 번 결론을 낸다. 이런 선택이어야만, 아픈 과거와 깨끗하게 이별하고 다가올 미래는 온전히 당신과 나누는 행복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구나. 그는 고민 끝에 결국 웃어버리고 만다. 당신이구나. 결국 어디서 무엇을 하든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과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해 왔던 거라고.  


두 달, 아니, 나의 온 생애가 오로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 걸어온 시간이라고, 이제는 확신할 수밖에 없다. 당신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던 “도망칠 생각 하지 말아요.”라는 말. 허투루 들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 다시 한 번 가슴이 짜릿짜릿해질 정도로 실감하고 있다.  


도망칠 수 없는 나는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피고 질 운명. 


비행기가 부드럽게 지면에 내려앉아 잠에서 깬다. 활주로에 발을 디디자 낮선 땅에서 익숙한 향이 훅 끼쳐온다. 꼭 풀꽃 같은 단향이 온몸으로 스며들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여권에 도장을 찍어 준 입국심사관에게 그는 어색하게 Ευχαριστώ(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보고, 미소 띤 끄덕임을 돌려받는다. 사람들이 나가면서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자동문이 저 멀리 있다. 그 사이로 꿈에 그리던 밀빛 머리칼이 보이지 않는지 그는 가늘게 눈을 뜬다. 어느새 다리가 제멋대로 뛰고 있다. 느긋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속속 제치고 자동문 너머로 나온다.


플래카드를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는 걸어나간다. 입이 바짝 마르고 가슴을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내리는 것 같다. 어디에도 당신이 보이지 않아 점점 숨이 가빠 온다. 지금 당장,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깨를 톡 치는 손길에 그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다. 그보다도 더 놀랐는지 뒤로 흠칫 물러나며 맑은 연둣빛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본다. 이내 그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르르 녹는 듯한 눈웃음. 고대하던 순간을 맞이해놓고도 사시나무처럼 떨기만 하는 몸을 당신은 부드럽게 감싸안고 이마를 맞대어온다. 당연하게 이어지려는 흐름을 그는 마지막 인내심으로 잠시 가로막는다. 입술을 달싹일 수도 없게 되기 전에 그에게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스물한 번째 생일 축하해요, 코레.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하게 될 수많은 키스 중 첫 번째를, 평생 한결같을 뜨거움으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