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코레 A. 아마란테] 코레 생일 축전 20210826

커뮤/코레 A. 아마란테 2021.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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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거리는 소리가 이내 멎는다. 조각칼과 엉성하게 깎다 만 꽃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켜자 온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의자에 늘어져 깊이 몸을 묻고 마스크도 벗고 손으로 눈가와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준다.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힘든 줄도 모르고 몰두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정신을 차리면 피로가 한번에 몰려와서 회복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어느 경지에 이르면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조각칼은 단단한 나무를 두부보다 부드럽게 파고들고, 눈에 힘을 주고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 깎아낼 수 있게 된다고 하던데… 그저 취미생활을 조금 오래 해온 범재(凡材)인 자신에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조각칼을 쥐는 건 때로 여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하게 실력이 늘었어도 여전히 그렇다. 즐겁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때로 즐거움의 몇 배에 달하는 답답함과 짜증이 몰려온다. 수백 번 깎아 딱 한 번 마음에 드는 모양이 나오고, 그걸 다시 수백 번 반복하다 보면 결국 셀 수도 없이 깎아낸 자리들이 모여 결코 최고라고는 할 수 없는 작품이 나온다. 얼마 없는 잘 깎은 곳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훨씬 많은 성에 안 차는 곳을 보며 낙심하다가. 결국 털어버리고 다음엔 어떤 연습을 할까 무얼 만들까 고민하는 것부터 되풀이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견뎌가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잘하고 싶다는 건 그런 건가 보다. 

 

요 며칠 사이엔 그렇게 넘쳐나는 부족함을 견디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능률은 물론이고 멘탈까지 회복 불능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일이란 게 다 그렇듯 안 풀리면 잠깐 숨 돌리고 다시 하면 되고, 그걸 반복하다가 안 되겠으면 자고 다음날에 하면 되고, 그래도 모자랄 때쯤이면 주말이 오니 푹 쉬면 되는데… 지금은 그보다도 심각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휴가가 필요하다. 아예 며칠은 조각칼을 내려놓고 작업 생각도 머리에서 싹 몰아내고 완전히 새로운 장소에서 기력과 영감을 채워넣어야 한다.

 

도구를 제자리에 정리하고, 앞치마와 마스크도 벗어놓고, 톱밥 청소와 환기까지 깔끔하게 마쳤다. 벽걸이 달력을 보면 어느 한 날에 빨간 동그라미와 별 세 개로 강조 표시가 되어 있다. 한 해를 열심히 살다 보니 벌써 성큼 다가온 8월 26일. 이 날이 어떤 중요한 날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한 해 중에 제일 특별하고 즐거운 날로 만들어줘야만 하는 코레의 생일. 흐뭇하게 달력을 보고 있다가 핸드폰을 켰다. 생일도 축하하고 멋진 휴가도 보낼 만한 장소를 여기저기 검색해보다가, 시선이 꽃힐 수밖에 없는 완벽한 장소를 찾았다. 당사자의 의견을 물으러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선다. 

 

작업실에서 여기 서재로 오면 꼭 황야에서 숲으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저기는 단조롭고 건조하고 나무 냄새만 풀풀 나는데, 여기는 일단 문을 열자마자 이름 모를 싱그러운 연두색 풀들이 반겨주니까. 기분 좋게 촉촉한 공기에서 종이와 풀 냄새가 물씬 난다. 한 사람 취향대로 골라진 온갖 책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중후한 나무 책장에 잠시 시선을 두다 보면 스르륵 하고 책장 넘기는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창가 앞 세상 푹신해보이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티 테이블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차와 버터 쿠키도 두고 자기 세상에 빠져있는 이 방 주인님.

 

나보다도 한 수 위인 집중력으로 활자에 몰두하고 계신 이 분. 사람이 들어와서 뒤에서 날 좀 봐주세요, 하고 얼쩡거리는데도 미동도 없다. 어깨너머로 슬쩍 보니 책이 몇 장 남지 않은 모양이라 잠시 기다리도록 한다. 책 속 세계에 자기를 온전히 쏟아넣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소중한지는 이 분께 잘 배워서 알고 있으니까. 귀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게 숨을 죽여가며 책을 하나 골라 서문을 읽고 있다 보면 후, 하고 기분 좋은 한숨소리와 함께 책 덮는 소리가 난다. 재밌었어요? 하고 넌지시 물어보니 움찔 하는 어깨가 제법 귀엽다. 살짝 동그래진 눈으로 돌아보는 것도 귀엽다. 반짝이는 연둣빛 눈도, 배시시 웃는 표정도 코레는 그냥 다 귀엽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귀엽기만 한지 네 번이나 귀엽다고 생각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요. 이번엔 어떤 책?”

 

『늦여름』이에요, 오스트리아의 괴테라는 슈티프터의 소설인데, 그래서 꼭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느낌이랄까?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성장하는 인간 내면의 조화를 섬세하게 잘 표현해내서 정말 재밌었어요.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세계를 그려내는 것까지 정말 괴테랑 판박이인데…”

 

맞은편 의자에 앉아서 쿠키를 하나 집어먹으며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코레는 특히 생기가 넘쳐서 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학생 시절부터 같은 책을 보고 같은 꽃을 봐도 코레는 이토록 길고 자세하고 배울 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몇 번을 다시 봐도 놀랍고 부러운 재능이다.

 

“…그러니까 시간 나면 꼭 읽어 봐요. 당신 작품에도 좋은 영감이 될 만한 부분이 잔뜩 있으니까… 앗, 또 나만 실컷 말했죠.” 

 

“괜찮아요, 당신 이야기하는 건 언제 들어도 재밌어요.”

 

코레는 열심히 이야기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차를 꿀꺽 마시고는 생글생글 웃음짓는다.

 

“작업은 잘 되어 가요?”

 

“그게, 일이 너무 손에 안 잡혀서 재충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우리 올여름엔 아직 휴가도 안 갔잖아요? 당신 생일도 얼마 안 남았고… 맞춰서 다같이 어디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요.”

 

미리 찾아 둔 장소를 핸드폰으로 보여주자 안경을 치켜올리며 확인하더니, 눈을 감고는 고개를 슥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건 취향이 아닌 걸까, 잠시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제법 구미가 당기는 표정이 되어 눈을 뜬다.  

 

“숲 속으로 캠핑이라, 어렸을 때 가족들하고 간 이후로 처음이네요. 그런데, 바다로는 안 가도 돼요?”

 

내가 바다를 워낙에 좋아하니 우리 가족이 휴가 계획을 짤 때는 가장 먼저 바다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도 이번에는 생일에 맞추는 거니까 주인공이 가장 좋아할 법한 장소로 고르는 게 당연하다. 내가 바다에 빠져 있을 때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는 코레의 말마따나, 코레도 수해(樹海) 속을 거니는 시간을 한껏 즐기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말해주니 코레는 반짝반짝한 눈을 하고, 내 무릎 위로 옮겨앉아 몸을 폭 기대고는 배부른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웃는다.

 

“자스민도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풀꽃이랑 나무가 잔뜩 있는 곳에 가고 싶다고 요전부터 이야기하던 참이잖아요? 쉬라몬은 어떠려나…”

 

“캠핑장 근처에 시냇물이 흐른대요. 거기에 빠트려 놓으…면 잘 놀 거예요.”

 

“빠트리다니 표현이 그렇지 않아요? 그래도 파트너인데.”

 

“우리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죽고 못 사는 사이인데 이 정도는 뭐 약과죠. 그리고 물이라면 아무튼 좋아할 걸요? 두고 봐요.”

 

실제로 쉬라몬은 온갖 이유로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매일매일 물어뜯으니 죽고 못 사는 사이란 말은 제법 진지했는데, 코레는 그냥 익살 정도로 받아들인 듯하다. 여하튼 이번 휴가의 주인공께서는 숲에서 맞는 생일 아침도 제법 낭만적일 것 같다며 적극 찬성의 뜻을 밝힌다. 

 

숲으로 캠핑 가자는 말에 자스민은 꽃잎이 활짝 펴서는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쉬라몬은 언제나처럼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풍덩 빠지기 좋은 물이 있을 거라는 말도 곁들이자 눈썹이 조금 올라간다. 저 정도면 제법 흥미를 가졌다는 뜻이니 얌전히 따라오겠지.  그렇게 가족 회의를 거쳐 이번 휴가는 숲 속에서의 1박 2일 캠핑으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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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8월 25일 아침. 날씨는 최고, 준비는 만전. 나는 이따 먹을 도시락을 싸고, 코레는 다이어리에 리스트를 적어 놓고 혹시라도 안 챙긴 물건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한다. 자스민은 벌써부터 주체할 수 없는지 쉬라몬 앞발을 잡고 춤을 추고 있고, 앞발을 잡혀 엉거주춤하게 일어선 댄스 파트너 쉬라몬은 벌써 피곤해보이는 표정이다. 오늘도 아침부터 물림 포인트 1점 적립하고 시작이다(물론 물리는 건 나지만).

 

“춤은 이따가 숲에 가서 추자. 자스민은 방마다 들어가서 창문이 닫혀있는지 확인해 줄래?  전원 콘센트도 끄고.”

 

“응!” 

 

보온 가방에 두 명과 두 마리분 도시락을 차곡차곡 채워 벌써 낡고 지친 쉬라몬 앞에 놓아주었다. 험상궂게 올려다보며 이빨을 딱딱거리다가도 마지못한 듯 가방끈을 물고 차고로 옮겨다 준다. 좀 뾰족하긴 해도 착한 녀석이라니까. 마무리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옷도 갈아입고 소지품도 마저 챙기고… 그러다 보니 벌써 아홉 시 십 분, 출발 예정 시간이 지나버렸다.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확실히 한 후에 차고로 가면 코레와 두 디지몬이 트렁크에 짐을 다 실어놓고 차에 타서 기다리고 있다. 운전석에 앉아 이 날을 위해 특별히 산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보자 자스민이 파하학 웃는다. 

 

“당화 눈이 까매졌어! 이상해!”

 

“그렇게 이상해? 당신 보기엔 어때요?”

 

“귀엽기만 한데요 뭐.” 

 

역시 당신밖에 없어! 뜨거운 눈빛을 교환하는 우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쉬라몬은 못 본 체 하자. 안전벨트를 매고, 뒷좌석의 둘도 제대로 벨트를 채운 걸 확인하고 휴가를 시작하는 엑셀을 밟는다. 

 

복잡한 시내를 지나 교외로 차를 몰자 점점 풍경이 바뀌어간다. 건물들의 키가 어느 순간 작아지는 것 같더니, 어느새 여름의 초록으로 넘실거리는 평야와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위에 쨍하니 새파란 색으로 대조를 이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까지. 창문을 열면 맑은 공기가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려놓는다. 휴가 분위기가 제대로 나니 가슴 속부터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두 시간 가량 풍경을 만끽하며 여유로이 국도를 달리다가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숲속으로 난 도로로 접어든다. 키 큰 나무들이 도로 주변에 빼곡히 서 있는 걸 보자 코레와 자스민의 눈이 한층 더 반짝거린다. 완벽한 휴가지 선정이 틀림없어. 밀려오는 뿌듯함을 즐기며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까지 힘내기로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조금 들어가보니 걸터앉기 좋은 큼직한 바위와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돌을 동그랗게 둘러놓은 얕은 구덩이가 있다. 그 옆에는 텐트를 치기 딱 좋은 마른 흙이 평평하고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바로 여기서 캠핑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듯한 장소다. 

 

텐트부터 치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있으려니 자스민이 안달이 났다. 어서 가서 마음껏 놀고 싶을 테지. 여름이니까 7시는 되어야 해가 지기 시작할 테고, 실컷 놀고 온 다음에 준비를 해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차에서 도시락 가방과 돗자리 등등을 챙기고 나자 자스민은 벌써 쉬라몬을 데리고 저만치 앞서가는 중이다. 코레는 저 애들 길을 잃으면 어떡하나 걱정 중이지만, 둘이 같이인데다가 디지바이스도 챙겨왔으니 괜찮을 거라고 안심시킨다. 무엇보다 이러는 편이 우리 둘이서 오붓하게 있기에는 더 좋으니 속으로는 자스민에게 참 고맙다.  

 

낡고 편한 신발로 갈아신은 후에 본격적으로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여기 살기 시작한 이후로 이런 본격적인 숲에 들어와보는 건 처음인데, 한국의 숲과는 나무의 종부터가 다르다 보니 분위기가 판이하다. 외국 영화나 그림에서나 볼 법한 분위기. 빨간모자와 늑대 같은 동화 속 주인공이 튀어나온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만 같다. 그래도 숲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상쾌함과 평온함만은 어딜 가나 똑같은가보다. 여름답지 않게 약간 차갑고, 달콤한 흙내도 스민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자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스르르 녹아버린다. 

 

옆을 돌아보니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여름 햇살을 받아 코레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녹음(綠陰)의 풍경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한 조각인 것처럼, 마치 길을 잃은 숲의 정령이 오랜 시간 헤메다가 겨우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이 숲과 코레는 너무도 완벽하게 어울려서 둘이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숲의 여기저기를 살피던 코레가 앗, 하고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코레는 길가에 쪼그려앉아 손가락을 조심스레 뻗어 무언가 매만지고 있다. 샛노란 잎이 여섯 장 모인 조그마하니 귀여운 꽃을 보고 내 얼굴에도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예쁜 꽃과 더 예쁜 사람이 모여있는 장면을 놓칠 수 없어서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사진을 찍다가, 렌즈 너머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코레와 눈이 마주친다. 

 

“이 꽃 때문에 여길 오자고 한 거예요?”

 

이게 무엇이냐면 노란별수선이라는 꽃으로, 꽃말은 “햇빛을 찾다”. 하지만 꽃말과는 반대로 너무 햇빛이 강한 장소에서는 잘 피지 않는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적당히 햇볕을 가려줄 수 있는 이런 숲에서 가장 예쁘게 핀다고 한다. 뭐니뭐니해도 이 꽃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바로 8월 26일의 탄생화라는 점. 이 숲이 이번 휴가에 완벽한 장소라고 처음 보자마자 확신한 또 다른 이유이다.

 

“마음에 들어요? 내가 심은 꽃은 아니지만.”

 

대답 대신 코레는 쪼그려앉은 채 오리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어와서는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친다. 얼마만큼 마음에 드는지 알 수 있겠느냐는 듯한 무언의 몸짓은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입가가 꾸물거리는 걸 견딜 수가 없다. 아주 쏙 드나 봐요, 말 안 해도 알겠어요, 라고, 역시 무언으로 대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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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두 녀석은 얼마나 앞서간 건지 반 시간쯤을 걸었는데도 보이지가 않는다. 프랑스의 여름 숲속은 햇볕이 드는 곳은 더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시원하다. 코레는 셔츠 위에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내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다. 

 

“설마 진짜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아, 저어기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요상하게 생긴 큼직한 꽃 한 송이가 살랑거리고 있다. 보드라운 흙 속에 꽃잎 머리만 쏙 나온 채로 묻혀있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자스민이다. 땅을 대신 파줬는지 앞발이 새까매진 쉬라몬은 드러누워 기진맥진해있다. 보기에는 좀 이상할지 몰라도 저건 자스민의 오래된 취미이다. 근본이 식물이다 보니 흙 속에 몸이 들어가 있으면 편안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여기 흙 엄청 맛있어! 완벽해! 뭘 심어도 쑥쑥 자랄 거야.”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흙 속의 영양분을 맛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 같다. 참고로 그런 습성을 이용해서 코레는 화단을 갈아엎을 때면 가장 먼저 땅을 파서 자스민을 집어넣고 흙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고는 하는데, (“조금 싱거워!” “그래? 그러면 질소랑 칼슘이 많이 든 비료를…”) 보고 있으면 묘하게 재미가 있다. 

 

얼마나 좋은 건지 절대 나오고 싶어하지 않는 자스민을 도시락 먹으러 가자고 잘 구슬러서 겨우 땅에서 뽑아냈다. 오 분 정도 더 걸어가자 어느 순간 나무들이 일제히 사라지더니 이윽고 숲 사이의 너른 들판에 다다랐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풀과 꽃이 살랑거리며 초록의 파도가 친다. 자스민이 우와아아! 하면서 달려가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하지만 푹신한 풀 위라 하나도 아프지 않은지,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풀 융단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좋은 장소도 나왔고 시간도 딱 맞아떨어진다. 돗자리를 펼치고 도시락을 꺼낸다. 어렸을 적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소풍이건만 이렇게 올 일이 생기면 머릿속에 무조건 도시락 메뉴 1순위로 떠오르는 건 김밥이다. 한국인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내가 쉬라몬 앞발을 열심히 닦아주는 동안, 땅에 들어갔다 오느라 흙강아지가 된 자스민은 은근슬쩍 김밥을 먼저 집으려다가 코레한테 턱 잡히고 만다. 온몸을 물티슈로 뽀득뽀득 닦이면서 불쌍한 눈으로 이쪽만 쳐다보길래 김밥 하나를 입에 쏙 넣어주었다. 

 

“맛있어!” 

 

김밥에 과일까지 실컷 먹고 둘은 그대로 풀밭 위에 드러눕는다. 예의바른 코레는 이 개구장이들을 가볍게 흘겨봤지만, 소풍까지 왔는데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은지 잔소리를 하지는 않고… 도리어 자기도 은근슬쩍 누워버린다. 

 

“웬일이에요? 밥 먹고 누우면 항상 잔소리하는 선생님?” 

 

“저라고 누우면 편한 줄 모르는 건 아니라구요. 더군다나 이렇게 멋진 곳이잖아요.”

 

웃긴 했지만 코레 말대로다. 햇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향긋한 풀내음도 나는 이런 완벽한 곳에 드러누워 낮잠 한숨 안 자면 도리가 아니다. 옆에 풀썩 눕자 기다렸다는 듯 품에 꾸물꾸물 파고든다. 햇빛에 말랑따끈하고 안기 좋은 사람까지 있으니 조금 덥지만 이렇게 기분좋게 있을 수 있는데 더운 것쯤은 일도 아니다. 

 

코레의 머리카락은 회색이 많이 도는 밀색이다. 그런데 이 머리카락, 햇빛을 받으면 색이 신기하게 변한다. 분홍색이나 자주색이 살짝 섞인 황금색 비슷한 색으로, 금실로 짠 매끄러운 비단처럼 보드랍고 찰랑거린다. 사진으로 찍어보려 해도 렌즈에는 이 오묘함이 다 담기지 않고, 오로지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직물. 어쩜 사람이 이렇게 예술품같지 않은 부분이 없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손끝을 사이에 넣고 빗으로 빗듯 살살 매만지다가 나도 스르르 잠이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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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고 일어나니 가족이 늘었다.

 

상식적으로 오해할 일은 없겠지만 이상한 상황은 맞으니 첨언해두자. 우리 애가 아니다. 우리도 자다 깨서 놀랐다. 자스민과 쉬라몬이 흔들어 깨우길래 다시 숲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보다~ 하고 몸을 일으켰더니, 눈앞에 처음 보는 다섯 살 남짓 인간 어린아이가 있지 않은가. 울먹거리면서도 프랑스어로 열심히 조잘거리는데, 중간중간에 엄마나 아빠를 일컫는 단어가 섞여 있다는 건 알아듣겠다. 부모와 함께 놀러왔다가 숲에서 길을 잃은 게 확실하다.

 

듣자 하니, 둘이 먼저 깨서 숲에 들어갔다가 이 애가 혼자서 울고 있길래 무작정 데려온 모양이다. 이마를 짚고 싶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아이가 괴생물(보통 인간의 입장에서)들을 무서워하지는 않은 것 같고, 그 괴생물들은 그저 우리 잘했지? 하는 표정이므로 적당히 칭찬을 해줬다. 부모가 가까이 있을 확률이 높으므로 그 자리에서 기다리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자스민과 쉬라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우리한테 데려온 걸 테니 그 정도는 괜찮다.

 

초콜릿을 꺼내주자 아이는 열심히 먹느라 울음을 좀 그친다. 가만 보고 있으니 금발머리에 눈은 파랗고, 볼이 뽀얗고 오동통한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코레도 잔뜩 귀여워하는 눈으로 보면서 프랑스어로 아이에게 조금씩 말을 걸어본다. 상냥한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는지 조금 지나자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코레에게 종알거린다.

 

“가족들이 텐트에서 자는 사이에 몰래 나왔다는 것 같아요. 모험심이 대단한걸요.” 

 

숲 지도를 찾아보니 주변에 다른 캠핑장이 있다. 방향을 아는 어른이라면 여기서 10분도 안 걸려서 다다를 만한 거리지만 아이에게는 제법 열심히 걸어야 할 정도다. 혼자 들어온 숲은 묘하게 서늘하기도 하고, 주변엔 온통 비슷하게 생긴 나무들밖에 없으니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도 안 가고 무서웠겠지. 안 되는 프랑스어로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가자” 라고 말해주니 아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아이는 두 디지몬이 무척 신기한가보다. 자스민을 가리키면서 “꽃!” 하더니, 쉬라몬을 가리키면서는… 조금 망설이다가… “송아지?” 하고 영 확신이 없는 말투로 물어본다. 코레가 “송아지가 아니고 고양이야.” 라고 해주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실제로도 고양이는 아니고 바다표범 비슷한 거지만, 하는 짓만 보면 적당히 고양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취급에 별로 불만도 없는 것 같고.

 

그러다가 자스민이 아이를 번쩍 들어서 쉬라몬 등에 태워버린다. 쉬라몬은 웬만한 중형견만한 사이즈인 데다가 디지몬인 만큼 같은 사이즈의 동물과는 비교할 수 없이 힘이 세서 어린아이 하나를 태우고 돌아다닐 정도는 된다. 물론 당사자는 굉장히 피곤해하지만… 꺄르륵 웃으며 좋아하는 아이에게 성질을 부리지도 못하고 얌전히 걸어가준다. 자스민은 자기 나름대로 아이를 웃게 해준다고 옆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에게는 소음공해여도 아이에겐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콘서트인가 보다. 방금 만난 셋이서 잘 노는 모습이 제법 웃겨서 코레와 함께 뒤에서 몰래 웃었다. 

 

문득 코레가 “셋 다 정말 귀엽네요.” 하길래 옆을 봤더니,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번지면서도 아까하고는 다르게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입 밖으로 “왜…” 까지 내다가, 문득 가슴을 쿡 찌르고 들어오는 생각이 있어 끝까지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코레도 뭔가 더 말하지는 않고 그저 손만 꼭 잡아올 뿐이었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맥박이 조금 빠른 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그냥 열심히 걷고 있어서일까? 알 수 없다. 

 

나무들을 가로질러 걷다 보니 우리 캠핑장과 거의 똑같이 생긴 공터에 텐트가 쳐져 있다. 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우리보다 열 살 정도씩 나이가 많아보이는 부부와 이 애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형제뻘의 아이. 쉬라몬 등에서 펄쩍 뛰어내린 아이가 부리나케 달려가서 부모의 품에 폭 안긴다. 요상하게 생긴 짐승들과 함께 있던 걸 보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멀쩡한 인간인 우리를 보고 일단 안심한 눈치다. 나보다 프랑스어가 능숙한 코레가 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아이 부모에게 몇 번이나 인사를 받고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미아 사건은 이렇게 훈훈하게 끝난다.

 

아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꽃! 고양이! 잘가~” 하고 우리에게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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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놀아주느라 쉬라몬이 무척 지친 표정인데 기운이 나게 해줄 방법이 있다. 산책로를 한 바퀴 돌아 우리 캠핑장 근처로 돌아오면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냇가가 보인다. 물을 보자마자 눈이 번뜩하길래, 으랏챠! 하고 번쩍 들어올려봤다. 무슨 짓이냐 인간? 하고 묻는 듯 사납게 그르렁거리는 녀석. 하지만 다 널 위한 거라고. 온몸에 힘을 실어 시냇물에 힘차게 집어던지니 듣기만 해도 시원한 풍덩! 소리가 난다. 한참 후에 물 밖으로 머리만 쏙 튀어나온 녀석은 여전히 나를 째려보고 있지만 경험상 저 정도면 제법 우호적인 표정이다. 나는 그만 코레를 보며 의기양양해진다.

 

“아무튼 좋아한댔죠?”

 

“풋, 그렇긴 하지만 막 던지면 위험하니까.”

 

마음만 같아서는 같이 물에 뛰어들고 싶어도 숲에서 생각보다 시간을 많이 보냈다. 빨리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저녁 준비가 늦을지도 모른다. 시원한 물로 손 씻고 세수 정도만 간단하게 한 다음, 따끈하게 달궈진 바위에 앉아 세상 평화롭게 물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코레와 자스민에게 물을 튀겨준 다음 얼른 도망친다. 

 

혼자서 뚝딱뚝딱 텐트를 치고 그릴 속에 숯도 채우고 아이스박스에서 저녁 재료를 꺼내고 있으려니 끝내주는 물장난을 쳤는지 흠뻑 젖은 셋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온다. 해질녘이 돼서 서늘한 바람도 불고 코레는 조금 추운 모양이다. 관리실에서 미리 받아놓은 장작을 구덩이에 차곡차곡 쌓고, 함께 받은 기름을 조금 뿌린 다음에 성냥불을 던져넣자 타닥타닥 기세 좋은 모닥불이 확 일어난다. 셋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불가에 손을 뻗고 멍 때리는 모습도 사진을 찍어 놔야지.  

 

그릴을 확인해보니 미리 불을 붙여둔 숯이 하얗게 잘 탔다. 캠핑의 묘미라고 하면 역시 야외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라고 유튜브에서 열심히 배워 온 참이다. 어젯밤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둔 비장의 무기를 꺼낼 시간이다. 

 

“자, 손이 있는 두 분은 집합! 저녁을 빨리 먹으려면 일을 합시다.”

 

“쉬라몬은 털 잘 말리고 있어~” 

 

계란 크기로 잘라서 양파와 식초, 향신료에 절여둔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파프리카와 토마토, 양파, 레몬 등 야채와 함께 손잡이가 달린 꼬챙이에 차곡차곡 꽃는다. 투박하고 큼직한 고기 꼬치가 만들어지면, 다음에 할 일은 그냥 숯불 그릴에 올려놓는 것뿐이다. 샤슬릭이라고 하는 러시아식 꼬치구이. 고기 기름이 숯으로 뚝뚝 떨어지자 치익, 하는 소리에 맛있는 냄새까지 진동을 한다. 이번엔 모두 그릴 앞에서 침을 꿀꺽 삼키고 있다. 이런 우스운 모습도 사진으로 찍어두면 다 추억이 되려나? 

 

황금빛으로 잘 익은 꼬치를 하나씩 쥐고 각자 좋을 대로, 그러나 하나같이 제법 전투적으로 먹기 시작한다. 두 먹보 디지몬은 말할 것도 없고, 늘 소처럼 느릿하게 우물거리는 코레도 오늘은 비교적 속도가 빠르다. 하루종일 몸을 움직였으니 배가 많이 고플 만도 하지. 크게 한 입 꼬치를 베어물자 입안에 행복이 넘실거린다. 실내에서 구운 고기와는 다른, 숯불만이 줄 수 있는 풍미에 그저 눈을 감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가져온 고기가 동이 나면 냄비에는 이미 뜨거운 물이 팔팔 끓고 있다. 다섯 개들이 순한 맛 라면을 전부 터서 스프를 탈탈 털면 행복은 제곱이 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자부심 같은 건 없다. 그런데도 대다수 한국인이 마치 유전자에 새겨진 것처럼 따라하는 습관이 어떻게든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고기를 먹은 후에는 탄수화물과 국물이 따라와야 한다는 그런 류의 습관들… 물론 영양학적으로는 매우 좋지 않지만, 늘 그렇게 주장하는 코레도 오늘만은 눈감아주는 듯하다. 야채를 듬뿍 넣고 순하게 끓인 특제 라면에 모두 다시 한 번 힘내서 포크와 젓가락을 치켜든다. 

 

…여름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쌀쌀해진 숲 속의 저녁. 모닥불 앞에서 따뜻한 국물까지 마시고 나자 모두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린다. 방금 전까지는 즐거운 대화와 웃음도 잔뜩 오갔건만, 분위기가 이렇게 무르익으니 다들 말을 더 꺼내기보다는 분위기에 취하고 싶어지는 것 같다. 배를 두드리며 또 드러누우려던 자스민과 쉬라몬은 그러다가도 나무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반딧불이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달려간다. 하루종일 놀고 나서도 어떻게 저런 기운이 나는지 대단하다며 코레와 마주보고 웃을 수밖에. 

 

허공을 수놓는 초록색 불빛들에 나도 정신이 팔려 있으려니, 코레가 슬금슬금 붙어앉아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담요를 펼쳐 나를 폭 덮어버린다. 조금 후에는 담요 하나에 둘이 쏙 들어온 모양이 된다. 이런 날씨에 전해져오는 따스한 체온이 각별하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모닥불이 너울거리면서, 초록색, 분홍색, 푸른색… 아름다운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을 흩뿌린다. 아주 찰나의 시간에만 보이는 그 미묘한 변화에는 그렇게나 뜨겁고 생동감 넘치는데도 도리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는 모순적인 힘이 있다. 둘이서 그렇게, 한참을 오가는 말 없이.

 

슬쩍 운을 띄우는 건 코레다. 

 

“이렇게 넷이서 지내는 거, 정말 행복하지 않아요?”

 

대답까지 조금 오래 걸린 건 식상하고 당연한 긍정의 표현 말고 조금 더 재치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라면 짧고 솔직하기만 한 대답도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을까. “응” 하고 대답해주자 코레가 머리를 툭 떨궈 내 어깨에 기댄다. 다시 시선이 불을 향한다. 

 

 “낮에 그 애를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침묵 끝에 이어진 질문은 생각했던 그대로였지만, 직접 들으니 가슴을 꽤나 아프게 찌른다.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할 정도로는 아프다. 그러고 있으려니 코레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잡고 자기 쪽으로 열심히 돌린다. 목에 힘을 줘서 버텨보려고 해도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다. 

 

“당신도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예쁘다고?”

 

“그것도 있지만 다른 거요.”

 

“… … …”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대답을 삼키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한다. 코레가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늘상 말하듯이 우리끼리 지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아직은요. 그치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는 게 아니다. 물론 부끄러움이나 작은 설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들도 같이 올라와서,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침울해진다. 

 

“아직도 불안해요?”

 

“…응.”

 

누구라도 살면서 처음 겪을 일, 되돌릴 수도 없고 평생 큰 책임까지 따르는 일에 대해 생각하면 불안해지고 만다. 코레 역시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코레에게는 서툴고 불안하면서도 결국 잘 해낼 자신을 상상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이 있다. 문제는 코레와 함께 잘 해나가야 할 나에겐 그런 힘이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아빠로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배운 적이 없다. 보고 배울 기회가 원천차단된 삶이었으니까. 유일한 혈육이나 다름없던 할아버지는 당신 나름의 헌신으로 손자를 길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방식에 아이의 영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사랑은 결여되어 있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만 행동하는 생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어색하고 모자란 재현이 되지 않을까. 이런 내가 아이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필요한 만큼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주제로 이야기해보는 건 처음이 아니지만, 매번 이런 불안감이 나를 좀먹는 건 막을 수가 없다.  

 

“저 애들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아요. 당신은 지금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요. 시간이 지나서 정말 때가 오면 지금보다도 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 … …" 

 

내가 새까만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때마다 이렇게, 나직하지만 강한 울림을 주는 한 마디를 이 사람은 어김없이 해준다. 나의 과거, 나의 불안을 전부 알면서도 이 사람은 어떻게 이토록 굳건하게 나를 믿어주는 걸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 사람의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단순히 사랑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올곧은 마음의 근원만은 알아낼 수가 없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오래 걸려도 기다릴게요. 자신을 못 믿겠다면, 당신을 믿는 저를 믿으면서 천천히 마음을 정리해 봐요.” 

 

다독여주는 손길, 따뜻한 눈빛에는 단단한 불안의 한 귀퉁이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무너진 곳에서는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함께라면 나의 부족한 면도 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이 핀다. 물론 어디까지나 거대한 불안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 스러진 것뿐이다. 평생을 쌓아온 감정의 응어리가 오늘 하루만에 기적처럼 사라질 수는 없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코레가 전해주는 이 따뜻함도 언제까지고 식지 않을 것이라는 작은 믿음은 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조그맣지만 단단한 확신으로 마음에 직접 속삭여주는 따뜻함. 

 

"분위기가 왜 이래-? 싸웠어?"

 

…마침 녀석들이 돌아왔으니 무거운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야겠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고 느긋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다음 번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힘들겠지만…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노력해야지. 그런 뜻을 담아 코레와 눈을 찡긋거리자 쉬라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불가에 드러눕는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 물을 끓여서 따끈한 코코아를 만들었다. 모닥불에 구운 마시멜로까지 띄워서 후후 불어가며 마시자 몸도 마음도 한결 훈훈해진다. 이제 시간은 열 시. 두 녀석은 이미 서로에게 기대어 꾸벅꾸벅 조는 중이고, 코레도 알찬 하루를 보낸 만큼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눈이 감기려고 한다. 나도 하품이 나서 안 되겠다. 이대로는 입이 돌아가게 생긴 셋을 어르고 달래 먼저 텐트 속 침낭으로 집어넣는다. 

 

뒷정리를 끝내고 들어오자 끝내주게 잘 자는 얼굴들이 있다.. 다들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지 입가가 조금씩 올라가 있다. 지금 함께 있는 가족들도, 그리고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는 새 가족도, 늘 이렇게 웃는 얼굴로 있어준다면 언제까지고 힘낼 수 있겠지. 침낭 속으로 들어가서 자스민을 안고 있는 코레에게 딱 붙자, 잠시 후에 등 뒤에서 북실북실한 털뭉치가 붙어온다. 웬일이람? 자기 전 마지막 장난으로 손을 슬쩍 빼서 등 뒤에 놓고 쭈물거렸는데… 각오를 단단히 했건만, 물린 손이 아니라 까끌까끌한 혀로 핥아진 손을 멍하니 본다. 

 

…감격에 겨워 울 뻔한 밤이 그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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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생일을 맞은 오늘의 주인공을 비명으로 깨우고 싶진 않았다. 최소한 그것보다는 멋지고 그럴싸한 계획이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다 차려놓고 기다리다가, 실컷 주무시고 일어난 주인공님이 텐트 밖으로 나오시면 케이크와 생일 축하 노래로 놀라게 해 드리고, 선물 증정식도 하고, 그렇게 웃음과 감동이 어우러진 이벤트를 무사히 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냐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리고 매우 치명적이다.

 

내가 기껏 준비한 생일선물을 챙겨오는 걸 까먹었거든. 

 

셋이서 몇날 며칠을 머리 맞대고 상의해서 고른 선물을 절대로 코레한테 들키지 않아야 한다고 나만 아는 곳에 꼭꼭 숨겨뒀는데, 어제 아침에 도시락도 싸고 하느라고 그걸 그렇게 까맣게 잊어버리고… 

 

코레가 일어나려고 꿈지럭거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케이크에 불도 붙이고, 노래도 부르려고 목도 잘 풀고, 마지막으로 선물을 꺼내려고 가방을 열었는데, 그 순간 싸한 냉기가 정수리부터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느낌에 딱 굳고 말았다. 케이크를 들고 있는 자스민과 고깔모자를 열심히 참아주고 있는 쉬라몬과 눈이 마주치고. 아니지? 설마 아니지? 하는 간절한 눈빛들에 해줄 수 있는 대답이 하나밖에 없어서 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서는.

 

“…미안…”

 

그리고 지금, 붕어눈을 하고 비몽사몽한 채로 텐트 밖으로 기어나온 코레와, 바닥에 엎어져서 원래 사나운 녀석과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나워진 녀석에게 물어뜯기 딱 좋은 양팔을 하나씩 내어준 나. 참으로 행복한 아침 풍경이다. 

 

정신을 차리고 자초지종을 들은 코레는 일단 파하학 웃고는, 내 팔을 열심히 깨문 두 녀석에게 당화를 괴롭히면 안 돼요~ 하고 가볍게 한마디씩 해준다.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주먹과 앞발을 꾹 쥐길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하루종일 제 생일이니까, 선물은 이따가 집에서 받는 걸로 하고,” 

 

자비로우신 오늘의 주인공은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의자에 앉아서 반짝반짝, 기대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 

 

“생일 축하 안 해줄 거예요?” 

 

그래, 우리에게는 공동의 목표가 있지. 두 녀석들과 무언의 휴전을 하고 얼른 케이크를 들어 코레에게 안겨준다.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고, 후 불어 촛불도 끄고, 이제 소원을 빌 차례. 코레는 플라스틱 칼을 들고서는 눈을 지긋이 감고 고민에 잠긴다. 

 

“음… 언젠가 이 숲에서 우리 가족들과 다시 즐겁게 캠핑을 했으면 좋겠어요.”

 

“소원을 말해도 돼요?”

 

“괜찮아요. 이 소원은 우리끼리도 이룰 수 있잖아요. 다들 같이 와줄 거죠?”

 

배시시 웃으며 케이크를 자르는 코레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