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코레 A. 아마란테] 코레 생일 축전 20230826
당화와 할아버지 둘이 사는 작은 섬의 하루는 아주아주 일찍 시작됩니다 새벽 세시가 되면 할아버지가 부스럭거리며 일어납니다 그러면 당화도 졸린 기색도 하나 없이 벌떡 일어납니다 처서가 지나서 여름은 대충 다 지나간 셈이지만 해는 아직도 일찍 뜨기에 일어나는 시간도 빨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네시쯤 일어날 수 있겠지만 아직은 먼 것만 같습니다
마당 저편에 있는 수돗가에 가서 얼굴에 물을 묻히고 이를 닦습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이 조그마한 집에서 긴 생과 짧은 평생을 산 두 사람에겐 앞이 안 보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오래 전 할아버지가 이 섬에 들어올 때 집터를 잡으면서 손으로 깎았다는 언제 봐도 대충 생긴 돌계단을 밟고 바닷가로 내려갈 때는 손전등을 켜긴 합니다 언제 한번 당화가 발을 잘못 디뎠다가 굴러서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요
신발 밑창으로 모래를 밟아 버석버석거립니다 파도 소리를 따라가면 언덕 위의 집만큼이나 낡고 낡은 통통배가 둥실거립니다 썰물일 때는 모래 위에 내려앉아 꼼짝도 안 하겠지만 밀물일 때는 이렇게 물 위에 떠서 바로 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섬에는 집도 있고 전기도 수도도 있지만 이 배 하나만을 위해 선착장을 만들 수는 없어서 이렇게 해놓고 살아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배의 시동을 걸면 당화는 모래톱에 박아놓은 두꺼운 나무 기둥에서 줄을 풀어냅니다 처음에는 작은 손으로 두껍고 거친 줄을 도저히 풀 수가 없어서 낑낑대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당화는 열 살이고 할아버지를 따라 배를 탄지도 벌써 이 년이 넘었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였습니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줄을 풀어서 둘둘 말아 배에 던져놓고는 다시 돌아와서 작은 당화를 번쩍 들어다가 배에 올려놓고는 했습니다 이렇게 쪼그매서 무슨 뱃일을 하겠다고 그러냐면서 혀를 쯧쯧 차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하지만 이제 당화는 기둥에서 풀어낸 줄을 손수 잘 말아다가 배에 가져다 놓을 수도 있고 훌쩍 뛰어서 가볍게 배 위에 올라탈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시동이 걸린 배가 드르륵, 드르륵 하는 시원찮은 소리를 내며 망망대해로 향합니다
세상은 온통 짙푸른데 빛이라고는 저 멀리 원양으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이십 와트 집어등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등대에서 나오는 불빛 그리고 할아버지의 담뱃불뿐입니다 오늘은 파도가 잔잔해서 작은 통통배는 기분 좋게 출렁거립니다 이렇게 바다 위에 있으면 당화는 누가 자기를 품에 꼭 안고 어르는 것처럼 편안합니다 세상에는 바다가 무서워서 못 견디는 사람들도 있다 그럽니다 당화는 아마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겠지요 담배를 꼬나물고 방향타를 잡고 있는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당화는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기억하는 한 할아버지는 한번도 자기를 안고 어른 적이 없는데 저 품에 들어가 보면 이런 기분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요 그치만 할아버지는 절대로 그렇게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당화는 지금보다도 어린 시절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와 자기를 번쩍 들어올려 배에 태우던 할아버지의 손은 매번 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화는 한 번도 왜 그렇게 떠는지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아서 그랬습니다 궁금해하는 대신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수평선이나 보고 있기로 합니다
엔진 소리가 잦아들면 이제 일할 시간입니다 그물을 쳐놓은 곳에 다 왔다는 뜻이니까요 쳐놨던 그물을 양망기(그물을 끌어올리는 기구)로 끌어올려 보면 오늘은 다행히 물고기가 그럭저럭 잡혀 있습니다 이만큼도 못 잡아서 팔 만큼도 고기가 안 나오는 날도 있으니까요 할아버지는 만선이 되게 해달라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아니건만 용왕님이 심기가 불편하신지 갈수록 고기 씨가 마르는 것 같다고 한숨을 쉬곤 합니다 여하튼 그물을 탈탈 털어내면 배 바닥에 온갖 고기가 파닥거립니다 큰 고기 작은 고기 통통한 고기 납작한 고기 여러 놈들이 짠물을 튀기며 나 살려라 하고 열심히 몸부림칩니다 그럴 때마다 당화는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바닥에 난 뚜껑을 열고 고기들을 잘 그러모아 집어넣습니다
물일은 쉽지 않습니다 바닥은 출렁이고 물고기들은 무거워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어선이 뒤집혀서 할아버지 알던 사람이 용궁에 가가지고 상을 치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 할아버지는 당화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으면 더욱 큰 소리로 야단을 치고는 했습니다 손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입에서 단내가 나지만 당화는 눈을 부릅뜨고 일합니다 그러다 보면 하늘이 파래지다가 노래지다가 어느 순간 반짝 해가 뜹니다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될 즈음이 되면 시야 한 켠에서 눈을 찌르르하니 아프게 하는 말간 아침 햇살이 시퍼런 바닷물 아래애서 솟아오릅니다 그것은 몇 년을 보아도 매번 똑같이 아름다워서 당화는 숨 쉬는 것도 잠깐 까먹고 물 위로 햇살 조각을 엮어 만든 융단이 사르르 깔리는 것을 지켜봅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꾸사리를 먹이는 할아버지도 해가 뜨는 순간은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당화는 팩 우유를 꿀꺽꿀꺽 먹고 할아버지는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먹습니다 그리고 커피 사탕도 까서 나눠 먹습니다 고된 일 후에 단 걸 먹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여섯시면 집에 옵니다 당화네는 다른 어선들처럼 일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닙니다 물고기도 적당히 팔고 돈도 적당히 모은다고 할아버지는 그랬습니다 얼마나 모았는지 당화한테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지만요 아침 먹을 생선을 두어 마리 챙기고 배를 묶어놓고 나서 돌계단을 밟아 집으로 올라오면 할아버지는 호스로 물을 틀어서 앞치마나 고무장화 장갑의 소금기를 씻어냅니다 그러면 당화는 옆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고 뽀득뽀득 씻습니다 여기서도 할아버지는 잔소리가 많습니다 당화도 안 씻으면 몸에서 생선 비린내며 조금씩 삭아가는 그물 냄새가 진동하는 걸 알기 때문에 꺼슬꺼슬한 샤워 타올에 비누를 문질러서 거품을 잔뜩 냅니다 머리도 비누로 잘 감고 귀 뒤도 씻고 배꼽도 잘 씻고 발가락 사이사이도 씻어야 합니다 수건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도 닦고 면봉으로 귀 속도 파내고 오늘은 손발톱이 길어 있으니 마루에 앉아서 야무지게 깎아줘야 합니다 빨래를 다 해놓고 생선 배를 따던 할아버지는 말끔해진 당화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마루에 물 떨어지지 않게 수건으로 꼼꼼히 좀 닦으라고 또 잔소리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둘은 아침을 먹습니다 오늘 잡은 생선으로 방금 끓인 생선조림이 있고 김치랑 미역줄거리 쌈장이랑 풋고추를 냉장고에서 꺼내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밥 먹을 때도 잔소리가 많습니다 음식은 애초에 안 남기니까 그건 괜찮지만 묻히거나 흘리면 꾸사리를 먹입니다 아닌 것 같아도 남들이 다 본다고 돼지처럼 밥을 먹으면 사람들이 너를 사람이 아니라 돼지인 줄 안다고 뭐라뭐라 그럽니다 당화는 열심히 열심히 그 쪼그만한 몸에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모를 고봉밥을 꾸역꾸역 집어넣습니다 생선도 가시만 남기고 야무지게 발라먹었고 김치도 통을 아주 비워놨습니다
필통에서 몽당연필을 꺼내다가 커터칼로 슥슥 깎아서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알림장이랑 종합장도 챙겨 넣었습니다 가방을 싸고 나면 이도 벅벅 닦고 옷도 개중에 깨끗한 걸로 탁탁 펴서 갈아입습니다 당화는 코에 팔을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습니다 이 정도면 일학년 첫 날 때처럼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학교에 못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일곱 시 사십 분이 되면 할아버지랑 같이 다시 배에 탑니다 뭍에 배를 대면 할아버지는 물고기를 팔러 갈 시간이고 당화는 이십 분쯤 걸어서 학교로 가야 합니다
교실에 들어가면 일찍 온 몇몇 얼굴들이 이쪽을 돌아봤다가 자기들 일로 돌아갑니다 당화는 딱히 섭섭해하지도 않고 자기 자리에 앉습니다 학교에는 당화를 괴롭히는 애들도 없지만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애들도 없습니다 읍내 저편에서 오는 잘 사는 애들은 좀 꾀죄죄하고 공부도 못 하는 것 같으면 무시하고 따돌리는데 당화한테까지 뭐라 하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잘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따돌려지는 입장의 애들이나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애들도 당화한테 가까이 오지는 않습니다 당화 역시 붙임성이 없어서 먼저 다른 애들한테 말을 걸지도 않고 그럽니다 점심시간이면 애들은 축구를 하러 나가고 공기놀이를 하고 그러지만 당화는 밥을 푹푹 퍼먹고(다른 친구들도 먹어야 하니 양껏 먹어본 적은 없습니다) 운동장으로 나가 주머니에 넣어둔 돌들을 만질 뿐입니다 돌을 깎아서 모양을 만드는 건 재미있고 시간도 빨리 가니까요 오늘은 쉬는 시간마다 갈매기의 오른쪽 날개를 깎아내고 있습니다 방해받을 일이 없으니 이럴 때는 친구가 없는 게 좋은 일 같습니다
열심히 뱃일을 하고 와서 학교에 오면 당화는 무척 나른합니다 그래도 수업 시간이 되면 당화는 졸린 것도 참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왜냐하면 성적이 많이 떨어지면 배를 못 타게 할 거라고 할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배를 타는 건 힘들지만 재미있고 당화는 배와 바다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을 사랑하니까요(사랑한다는 말을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고 해도요) 당화는 지금껏 힘내서 선생님들에게 칭찬 받을 만한 성적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면 공부란 건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첫 번째 시간인 영어만큼은 대체 왜 공부해야 하는지 항상 알 수가 없습니다 국어를 잘 하면 말을 잘 해서 생선 흥정을 잘 할 수 있을 거고 수학을 잘 하면 생선 값을 잘 계산할 수 있습니다 음악 시간에 노래 연습을 하면 뱃노래라도 맛깔나게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 말고 갈 데도 없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쓴다는 말은 배워서 뭣에 쓸 수 있을까요 생선을 피쉬라고 해봤자 평범한 생선이 금 바른 것처럼 비싸지는 것도 아닐 텐데요 그랬다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생선을 생선이라고 안 하고 이미 피쉬라고 하고 있었겠지요 그래도 당화는 연필로 교과서에 에프 아이 에스 에이치를 꾹꾹 눌러 적어 봅니다
토요일은 삼 교시뿐이라 열한 시 조금 넘어 학교가 끝났습니다 주말을 맞은 아이들이 그저 신나서 교문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평소 같으면 당화는 다른 데 기웃거리지 않고 포구로 향합니다 물고기를 어찌저찌 다 팔고 점심을 대충 때운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에 할아버지가 뱃일을 더 해야 해서 포구에 없으면 잠시 기다리다가 바다로 나가는 아무 어른 배나 얻어 타고 섬에 내려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포구 반대 방향으로 걸어서 읍내로 갑니다 토요일이면 보통 할아버지는 읍내 슈퍼에서 장을 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 야채도 길러먹고 해도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자급자족할 수는 없지요 비누도 칫솔도 사야 하고 우유도 사야 하고 마실 물도 사야 합니다 슈퍼 앞에서 할아버지가 담배를 태우다가 당화를 보고는 한 숨에 남은 담배를 빨아재끼고 안으로 먼저 들어갑니다 당화도 졸졸 따라 들어갑니다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카트에 물건을 잘 담으면서 슈퍼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당화는 잠깐 과자 코너로 샙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커피 사탕을 한 봉지 챙겨옵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을 과자도 하나 같이 들고 옵니다 장 보러 올 때마다 꼭 사는 것들입니다 할아버지는 커피 사탕이랑 과자를 들고 있는 당화를 보고는 피식 웃으면서 카트에 던져 넣으라고 턱짓합니다
토요일은 학교 급식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다른 일을 보기 전에 당화 밥부터 먹이기로 합니다 오늘은 당화를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줬습니다 친절한 사장님이 써비스로 군만두 먹을래 콜라 먹을래 물어봐서 당화는 군만두라고 했습니다 콜라는 예전에 마셔봤는데 목이 따가워서 제대로 마실 수가 없어가지고 이제는 누가 줘도 마시질 않았습니다 바삭바삭한 군만두도 먹고 당화는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상하게 할아버지는 짬뽕을 시켜놓고 오늘은 입맛이 없다며 반절도 못 먹고 그릇을 밀어놓았습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당화는 남은 짬뽕도 야무지게 다 마셨습니다 계산하고 나가는 길에 사장님이 어쩜 그렇게 잘 먹느냐며 또 오라며 당화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러자 당화는 낮선 손길이 어색해서 잔뜩 움츠러들었습니다 사장님은 애가 안 그러게 생겨서는 숫기가 하나도 없다고 깔깔 웃고 할아버지는 애매한 너털웃음이나 내보입니다
할아버지가 오늘은 안 가던 병원에 다녀와야겠다고 합니다 그동안 당화는 혼자서 읍내를 돌아다닙니다 학교 아이들이 참새처럼 들러붙어있는 새로 생긴 오락실에 얼굴을 들이밀어 봤지만 할 줄 아는 오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면이 빙글빙글 번쩍번쩍한 것이 당화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금방 도망나옵니다 대신 당화는 맛있는 기름 냄새가 나는 꽈배기집이나 기웃거립니다 주머니에 할아버지가 넣어주고 간 오백원짜리 두 개가 있어서 꽈배기를 먹을까 도나쓰를 먹을까 아니면 공룡알을 먹을까 당화는 아주아주 깊은 고민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누가 뒤에서 어깨를 쿡쿡 찌릅니다 당화는 뜨악 하며 돌아봅니다 몇 번이나 봐서 낮익은데도 아주 귀찮은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인데도 별로 안 보고 싶고 도망이나 가고 싶어집니다 꽤나 잘 사는 집 애인 것처럼 옷차림도 곱고 얼굴도 뽀얗고 머리도 단정하게 묶은 것이 귀티가 나는 여자애입니다 키는 당화보다 머리 반쯤 작고 아마 이 학년일 겁니다 보통 이런 애들은 자기들끼리만 노는데 왜 당화를 따라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요일이면 당화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이번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꽈배기 냄새에 홀려있느라고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너도 꽈배기 좋아하니 나도 좋아한단다 하고 여자애는 여기 사람은 안 쓰는 아주 고상한 말씨로다가 말을 걸어옵니다 당화는 대답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갑니다 여자애는 졸졸 따라옵니다 얘 나도 배고픈데 우리 저거 하나씩 안 먹을래 근데 내가 지금 돈이 없어서 사주면 다음에 꼭 갚을게 나는 공룡알이 좋아… 당화는 배고프다는 소리에 도망가던 발을 딱 멈췄습니다 자기보다 어린 애가 배고프다고 하는 걸 못 들은 척 하기가 좀 그랬습니다 이거 먹으면 집에 갈까 싶어 주머니를 털어서 여자애가 먹고 싶다는 공룡알을 두 개 사왔습니다 하나만 사줄까 했는데 그래도 두 개는 먹어야 배가 든든하지 싶어서 그냥 천 원 내고 두 개 사왔습니다 여자애는 와아 하면서 당화한테 매달립니다 당화는 그저 눈만 질끈 감습니다
여자애는 배고프다면서 공룡알을 씹기는 또 깨작깨작 씹습니다 저래서 언제 다 먹나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 먹는 것도 아니고 한 입 먹고 조잘조잘 두 입 먹고 조잘조잘합니다 오늘은 자꾸 얘 너 이쁘게도 생겼다 그럽니다 눈도 말간 갈색인 게 좋고 머리도 새까만 게 좋다고 그럽니다 당화는 갓 잡힌 물고기마냥 파닥파닥 하면서 자꾸 실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화를 냅니다 여기 지나가는 사람 중에 새까만 머리랑 갈색 눈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만 놀리냐고 그래봅니다 화를 내도 여자애는 웃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얘 너 돌 만지고 있는 거 봤어 모양을 잘 내던데 나도 보여주면 안 돼냐고 그럽니다 당화는 자기 솜씨를 칭찬해주는 건 또 처음 들어서 마음이 좀 누그러져서 주머니에 잘 들어있는 돌조각을 보여줍니다 이번에는 갈매기 모양으로 깎고 있었던 걸 여자애는 비둘기다! 이럽니다 그러더니 다 깎지도 앉은 걸 갖고 싶다고 하면서 갈매기를 벌써 제 것인 것마냥 손에 꼭 쥐고 당화를 올려다봅니다 또 파닥파닥하면서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자애 엄마가 금방 와서 애를 잡아갑니다 왜 저런 애랑 놀고 있냐고 야단을 치는데도 여자애는 손을 흔듭니다 깎다 만 갈매기도 손에 든 채입니다 당화는 기운이 다 빠져서 또 배가 고파졌습니다 공룡알을 하나만 사줄 걸 그랬습니다 아니지 다음에는 그냥 안 사줄 겁니다 여자애 엄마가 말한 저런 애 어쩌구는 읍내 저편 어른들한테는 자주 듣는 말이어서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았습니다
수협은행에서 할아버지가 나오는 걸 당화는 봅니다 당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석 같은 얼굴이나 하고 통 웃을 줄도 울 줄도 모르는 할아버지 얼굴이 그렇게나 핼쓱하고 백짓장처럼 창백해 보이는 건 처음 봅니다 왠지 모르게 무서워서 쭈뼛거리니까 할아버지는 눈을 껌뻑이더니 별안간 웃어보입니다 방금 전까지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이를 헤 드러내고 웃어보이니까 그건 더 이상해서 당화는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오늘은 배에 기름칠이나 하게 닭이나 사서 집에 들어가자고 그래가지고 고기 생각에 무서운 것도 날아갑니다 오. 고기. 시장에 가는 길에 할아버지는 친구를 만납니다 할아버지랑 친구는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서 담배를 한 대 태웁니다 당화는 또 돌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드문드문 들리는 할아버지와 친구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놈이 올해로 몇 살이든가 열 살이든가 부모 없이도 잘도 커 그런데 공부는 잘 허는가 오메 상을 탔어 난놈이네 난놈 그라믄 대학은 보내야 하는디 자네 돈은 모으고 있는감 대학이란 것이 젤루 좋은 데를 못 가믄 그 비싼 돈 다 내고 가야 하는디 지금부터 모으지 않으면은 어쩔라고 그러는겨 적금 들어 적금 근디 우째 숫기도 읎구 말도 잘 못 하는 것이 옳지 테레비를 좀 보여줘야지 자네 고 콩알만한 집에 테레비도 없지 요즘에는 테레비로다가 온갖 걸 다 보여줘서 똑똑한 사람 만드는 것이 유행이여 바보 상자라고 하지만은 그거는 잘못 써먹었을 때 얘기구 뉴스를 많이 보여주고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여주고 하면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전세계를 여행하는 거랑 또옥같은 학식이 쌓이는 법이구…
할아버지는 친구랑 헤어져서는 시장에 가다 말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또 담배를 한 대 태웁니다 그러더니 발을 돌려서 다시 은행에 들어갔다 옵니다 그리고는 시장을 가려면 저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꺾어서는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전자제품이라고 적힌 곳에 들어가니 바닥도 대리석으로 번쩍번쩍하고 에어컨도 시원하게 불고 뭔가 다르긴 다릅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뭔가 물어보더니 네모진 상자에 들어간 쪼그마한 테레비를 하나 샀습니다 할아버지는 웬만해서는 다른 사람 말을 듣는 법이 없는데 어쩌다가 친구 말을 듣고 테레비를 샀는지 당화는 신기해서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배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당화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거 보구 공부 해가지고 박사도 하구 선생도 하구… 했습니다 테레비를 본다고 그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화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가 웃는 게 조금 덜 이상하고 덜 무서웠습니다
집 지붕에 음푹 파인 큰 접시처럼 생긴 안테나라는 것을 달았습니다 잡동사니가 잔뜩 올라가 있던 다이 위를 치워내고 테레비를 올리고 선을 쏙쏙 꼽습니다 처음 보는 물건일 텐데도 할아버지는 설명서를 대충 읽고 나서 뚝딱뚝딱 잘도 해냅니다 평생 물고기만 잡으면서 살았다는 할아버지는 어디서 저런 손재주를 익힌 걸까요 당화는 문득 할아버지한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 한 번은 물어봐야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저녁 먹기 전에는 테레비를 켜볼 수가 있었습니다 뉴스를 잠깐 보던 할아버지는 혀를 쯧쯧 차더니 당화한테 리모컨을 넘겨줍니다 아무거나 보고 싶은 게 나올 때까지 채널을 바꿔보래서 채널이라고 작게 써진 고무 버튼을 꾹꾹 눌러봤습니다 뿅 뿅 하면서 화면이 돌아갑니다 뉴스도 나오고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나오는데 당화가 보기엔 다 그냥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당화는 세계의 바다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틀었습니다
평생 본 바다인데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들이 가득합니다 용왕님이 어찌나 화나셨는지 엄청나게 사납고 울렁거리는 바다도 나오고 속이 투명하게 비쳐보이는 옥빛 바다도 나오고 누가 물 속에 반딧불이라도 넣어놓은 것인지 은은하게 번쩍번쩍하는 밤바다도 나옵니다 세상에 그런 바다가 있는 줄 당화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테레비를 보면 공부가 되고 여행이 된다더니 할아버지 친구 말이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눈을 뗄 줄 모르는 걸 보고는 또 피식 웃더니 자리를 비켰습니다 그날 저녁 당화는 닭도리탕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화면 속으로 들어갈 듯 하다가 할아버지한테 기어코 꾸사리를 먹었습니다
여덟 시가 되면 이제 진짜 자야 한다고 할아버지가 리모컨을 가져가서 테레비를 꺼 버립니다 원래는 밥만 먹으면 바로 눕는데 오늘은 테레비를 본다고 늦게까지 있었습니다 평소면은 낡은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바로 다음날 배를 타러 나갈 시간이 되는데 오늘따라 당화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벌써 코를 고는 할아버지 몰래 몸을 일으켰습니다 집 밖으로 나와서 모래톱에 앉았습니다 달이 휘영청 밝아서 밤인데도 수평선이 보였습니다 처음으로 당화는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배를 타고 저 멀리 나가면은 무엇이 있을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아까 그 바다들에 진짜로 가볼 수 있는 걸까도 생각해봤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꼬부랑 말로 그 바다에서 본 적 없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하고 이야기도 할 수 있을까도요 당화는 자기가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가 이 섬에서 먹고 자고 생선을 팔며 사는 것 이외의 다른 미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달콤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서웠습니다 무엇이 있을 줄 알고요 어쩌면 배를 몰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할아버지 친구처럼 용궁에 갈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국어 시간에 읽은 이야기처럼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 섬에 갇혀 평생 부려먹히며 살지도 모르고요 그러다가 기어이 당화는 멀리멀리 가고 또 가서 마침내 무사히 지구 한 바퀴를 다 돌면 본 적도 없는 엄마 아빠도 찾을 수 있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은 어른들이 이따금 눈으로 손짓으로 몸짓으로 보여주곤 하는 부모도 없는 것이 하는 동정 같은 것도 당신들은 숨긴다고 숨기겠지만 어린 눈에도 왜 그러는지 뻔히 아는 그것들도 더는 안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당화는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습니다 당화는 그게 무서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구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끙끙 앓다가 모래톱에 누워서 깜빡 잠든 당화는 꿈을 꿨습니다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바다에 누가 서 있었습니다 그 여자애는 낮에 봤던 여자애는 아니었고 완전히 다른 본 적도 없는 애였습니다 신기하게도 눈이 나뭇잎 색이고 머리는 좀 덜 익은 꽈배기 색이었습니다 당화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가끔 해 주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선녀님인가 싶었습니다 얼굴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게 이상하게 코도 오똑하고 눈두덩도 들어가게 생긴 것도 선녀님이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자애는 당화를 보고는 배시시 웃더니 뒤돌아서 사라졌습니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렇게 가슴이 팔딱거리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당화는 꿈에서 깬 직후엔 온몸이 한여름에 선풍기도 없이 잔 듯 더워서 얼른 수돗가에 가서 머리부터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오늘 꿈을 잊어버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꿈이란 건 아무리 잊고 싶지 않아도 금방 잊어버리는 법입니다 새로운 일출을 배 위에서 바라볼 때쯤 그 여자애는 안타깝게도 당화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