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코레 A. 아마란테] 코레 생일 축전 202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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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이지만 당화는 집에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유월 햇볕으로 달궈진 모래사장에 스르륵, 하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발이 빠져들었더라면, 부드러운 찰싹 소리를 내며 모래를 적시는 바닷물에서 비릿한 짠내 역시 났더라면, 그리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야트막한 언덕 위에 낡고 작은, 떠나온 지 몇 년이나 된, 이제는 거기서 먹고 자며 잘도 십수 년을 살아온 자신이 신기할 따름인 그런 집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더라면, 정말로 속았을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2023년의 평균적인 기술력을 한참 앞서간다는 교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앞으로 십 년 이상 지나야 대중은 이 정도 기술을 일상에서 체감하게 될 것이고, 그때쯤 되면 아르콘테스 학생들은 이 가상의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퍼올려 고운 입자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각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당화에게는 모래 사이로 손을 넣어봐도 차갑고 거칠거칠한 우레탄 매트의 촉감일 뿐이지만.
- 가끔 들었던 네 섬 이야기를 토대로 구현해달라고 했는데. 향수병이 좀 가시는 것 같아?
왼쪽 귀에 착용한 수신기에서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멋진 풍경입니다. 그런데 향수병이라니요, 교관님.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걸요.”
- 그래? 이야, 당화 많이 컸네. 시험 공부하다가 바다 대신이라고 분수대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엊그제같은데. 난 네가 저 바다에도 뛰어들 줄 알았어!
뒤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려와 당화는 조금 얼굴이 벌개지고 만다. 뒤를 돌아보면 키득키득 웃고 있는 인간 소녀와 아예 바닥을 구르며 깔깔대는 꽃 하나, 그리고 쪽팔리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털짐승이 하나.
- 긴장이 좀 풀렸나 모르겠다. 그러면 시험을 시작해볼까?
입실할 때까지만 해도 얼굴이 창백해서 바짝 긴장해있던 코레가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어 있으니 와전된 소문으로 놀림거리가 된 것에도 나름의 가치는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당화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쉰다. 손짓으로 쉬라몬을 부르자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한 사나운 인상의 짐승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털레털레 걸어와 당화 앞에 삐딱한 자세로 선다.
- 디지털 월드에 투입되기까지 앞으로 일 년도 안 남았다. 실전과 유사한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경험을 쌓는 게 이번 학기 목표였다는 건 둘 다 알고 있겠지. 이번 변수는 부상으로 인한 공격 특기 인원들의 이탈! 방어와 회복 인원들이 전방에서 적대적인 디지몬들을 막아내면서 시간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 말과 동시에 잔잔하던 바다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쉬라몬은 으르렁거리고, 자스민도 활짝 폈던 꽃잎을 오므려 머리를 단단히 싸맨다. 코레는 셋에게서 약 3미터 정도 뒤에 선 채로 주변을 경계하며 디지바이스를 꺼내든다.
- 너희들이 제 몫을 해주지 못하면 후방에 있는 부상자들이 적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말 거다. 시험이라고 해도 동료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그럼 행운을 빈다.
통신이 끊기고, 파도를 헤치고 육지를 향해 걸어나오는 것은 두 종류의 디지몬, 한 개체는 붉은 산호 투구를 쓰고, 양팔은 자스민의 팔과 유사하지만 시퍼렇고 미끌거리는 질감의 촉수에 가깝다. 다른 한 개체는 딱 봐도 단단해 보이고, 군데군데 녹슨 금속처럼 생긴 우툴두툴한 껍데기로 온몸을 둘러싸고 있다. 한 쪽 집게발이 반대쪽에 비해 기형적으로 크고, 집게의 안쪽은 햇빛을 받아 칼날처럼 예리하게 반짝인다.
“성장기, 산호몬과 크랩몬이에요! 산호몬은 고압수를 쏘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독안개도 뿌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해요. 크랩몬은 말할 것도 없이 집게발 공격을 피해야 하고요!”
“자스민, 산호몬이 이쪽을 노리지 못하게!”
“맡겨 줘!”
쉬라몬을 향해 겨눠진 산호몬의 팔을 자스민이 쏘아낸 덩굴이 재빠르게 얽맨다. 자스민이 이야압, 하며 덩굴을 휘두르자, 산호몬이 중심을 잃고 넘어져 세찬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쏘아진다.
위험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무지개가 파란 하늘에 걸린다. 진짜 물보라였다면 머리카락과 어깨가 전부 젖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 쉬라몬은 목을 향해 짓쳐드는 거대한 앞발을 펄쩍 뛰어 유유히 피한 후, 오히려 크랩몬에게 파고들어 몸을 바짝 숙였다가, 덩치에 걸맞는 묵직한 몸통박치기로 크랩몬을 저만치 날려버린다. 쉬라몬은 기세를 타고 뛰어올라 훤히 드러난 크랩몬의 약점인 연약한 배에 앞발을 휘두른다.
치명적인 일격에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는 크랩몬. 자스민과 얽혀 독안개와 꽃가루 싸움을 벌이던 산호몬도 버틸 수 없었는지 도망쳐보려 하지만, 쉬라몬의 이빨에 꽉 물려 얼마 지나지 않아 크랩몬을 따라간다. 하지만 산호몬이 뿜어낸 독안개는 자스민의 몸에 달라붙어 팔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코레! 이거 따끔따끔해! 해독시켜 줘!”
당화는 코끝에 스치는 매캐하고 따가운 느낌에 몸서리를 친다. 작년 여름방학, 한국 남성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훈련소-기초군사훈련을 받았던 때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화생방실 안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연기, 살갗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갈고리들이 박힌 것처럼 따갑기 그지없는 CS 가스. 그것이 지금 자스민을 덮쳤다.
보이는 모든 것이 가상인 것은 아니다. 당화와 코레, 파트너들의 눈에 보이는 디지몬들은 실제로 형태를 가진 더미 로봇들 위에 디지몬의 형태가 투사된 것이다. 자스민이 덩굴로 잡아챘을 때도, 쉬라몬이 배를 내려쳤을 때도 전부 살아있는 디지몬을 공격한 듯 묵직한 감각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전은 독안개 공격을 대신해서 더미가 CS 가스를 분사한 것일 터.
CS 가스는 팔을 휘적휘적 휘두르기만 해도 금방 떨어져 나가지만 그것은 시험 바깥의 이야기. 엄연히 “중독”되어있는 상황인 만큼 코레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어야 한다. 코레는 가스를 살짝 들이마신 탓에 쿨럭쿨럭 기침을 하다가도, 살짝 떨리지만 막힘없는 손길로 디지바이스를 조작하여 직접 개발한 해독 프로그램을 자스민에게 적용한다.
몇 무리의 산호몬과 크랩몬을 몰아내고 안도의 한숨을 쉴 시간도 없이 이번에는 두 사람의 발밑이 흔들리며 모래가 요동친다. 갑자기 바닥이 꺼져 넘어진 당화는 쉬라몬을 불러보려 했으나, 쉬라몬은 바다에서 적들이 나올 것이라고만 생각했는지 포말이 앞발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가 있고 이곳과는 거리가 조금 있다. 모래를 뚫고 솟구친 샌드리자몬 세 마리의 시선은 모두 코레에게 향해 있다.
“이런, 매복이…!”
“자스민, 진화시킬게!”
쉬라몬이 오기 전까지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코레는 최대한 샌드리자몬들과 거리를 두며 자스민을 향해 디지바이스를 뻗는다. 빛에 휩싸인 자스민의 실루엣이 변하고, 모래톱에 조류의 발자국을 남기며 달려나가는 한 쌍의 길고 강인한 다리. 코레에게서 가장 가까운 한 개체를 몸통으로 밀어내고, 키위몬은 다른 두 개체를 향해 입을 쩍 벌린다. 조그마하지만 치명적인 꼬마키위몬들이 샌드리자몬들의 눈을 정확히 노리고 공중을 가른다. 당황한 샌드리자몬들이 잠시 멈춘 사이, 일어나서 중심을 잡은 당화도 코레에게 달려가 바짝 붙는다. 테이머들이 노려질 때는 각자 당하지 않게 최대한 붙어있기, 1학년 때부터 배우는 기본 전투 교리다.
“숙여! 폭발한다!”
두 사람이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몸을 바짝 숙이자마자, 샌드리자몬들에게 달라붙은 꼬마키위몬들이 폭발한다. 일격을 맞은 샌드리자몬들이 헤롱거리는 것을 이제야 도착한 쉬라몬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마무리한다.
무안한 듯 시선을 피하는 쉬라몬을 당화는 툭툭 쓰다듬는다. 쉬라몬의 과도한 호전성에서 비롯되는 허술함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것이고, 그것을 적정 수준으로 컨트롤하지 못한 것은 결국 테이머인 자신의 실책이다. 무엇보다 아직 시험이 끝나지 않았다. 피드백은 최선을 다해 시험을 마친 후에 하면 될 일이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코레가 파트너들의 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치료하고 있자면, 다시 바닷물을 가르며 나타난 것은 아까보다 한층 더 위협적인 상대.
“성숙기들이에요. 연체몬의 먹물은 막으면 마비가 올 테니 반드시 피해야 해요, 가재드라몬은 크랩몬과 비슷하지만 더 강할 테니 조심하고요!”
침착함을 유지하며 머릿속에 든 대처법을 풀어놓던 코레의 말문이 일순간 막히고 만다. 쉬라몬을 돌핀몬으로 진화시키려고 디지바이스를 들어올리던 당화도 마찬가지이다.
쇄도하는 연체몬과 가재드라몬의 뒤로 나타난 거대한 실루엣.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휘둘러져 가재드라몬의 단단한 외골격을 일격에 깨부순 금속제 망치는 과장을 섞지 않고도 코레만한 크기이다. 망치를 잡고 있는 팔은 바위 같은 근육이 불거져 꿈틀거리고 있다. 상아를 연상케 하는 새하얀 발톱은 날카롭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얻어맞았다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 것임을 예상케 한다.
작살처럼 톱니가 난 뿔, 금속이 박힌 가시 등딱지. 그 위압감은 누구에게나 죽일 듯 덤벼드는 불 같은 성정의 쉬라몬마저 한 발 물러서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완전체, 쥬드몬의 포효.
“잠깐, 교관님! 완전체를 상대한다는 말은…!”
- 코레, 실전에서 그런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수신기를 통해 전해지는 엄격한 목소리에 코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당화 역시,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감에 손이 떨리고 있다. 여태껏 책과 홀로그램 영상으로만 봐 왔던 맹수가 눈앞에서 실제와 거의 다르지 않은 존재감으로 서 있는 이 순간, 이 모든 게 시험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공포와 긴장에 몸의 통제권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돌핀몬도 키위몬도 완전체로 진화해 본 적은 없다. 두 파트너가 완전체가 될 수만 있다면 상대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성숙기 둘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체를 제압할 수 없다.
도망칠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부상당한 동료들을 뒤에 두고 서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진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는 것 같다고 당화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당화는, 땀에 젖은 왼손을 붙잡아오는, 역시 땀에 젖고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코레의 작은 오른손을, 손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를 느낀다.
… … …아득히 높은 파도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등불의 환상을 본다.
파도를 넘든, 가라앉든.
당신은 이곳에 있다.
두 사람의 심장이 이어진 것처럼 제멋대로 널뛰던 두 맥박이 점차 하나가 되어간다.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진 것처럼 키위몬과 돌핀몬이 앞으로 한 걸음씩 나선다.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쥬드몬 역시 한 걸음 다가온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두 걸음.
이윽고 쥬드몬이 천둥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뛰어오른다. 거대한 망치가 순간 태양을 가리고, 비장한 각오가 서린 각자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눈앞이 어둠으로 물드는 순간까지 당화와 코레는 부서질 듯 힘주어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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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하고 조명이 켜져 당화는 눈을 찡그린다. 아릿한 눈의 통증이 가시고 나면, 천장에 설치된 크레인에서부터 와어어로 공중에 늘어트려진 거대한 회색 더미가 보인다. 강당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 시뮬레이션 룸의 벽 속으로 더미가 수납되는 것을 당화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모래사장도, 파도도, 쥬드몬도 없는 현실이다.
“압도적인 전력차였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지?”
교관의 목소리가 조금이지만 한기를 머금고 있어서 두 사람은 자기들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대답을 이어가는 코레의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어 있다.
“…저희가 무너지면, 모두가 위험해지니까요.”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하지만 어떻게 될지는 너무 예상하기 쉽지 않았나? 무너질 걸 알면서도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걸로 뭔가가 해결될까? 당화, 그렇게 생각하니?”
당화도 대답하기 전에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목소리가 너무 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배에 힘을 준다.
“아니요, 그렇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코레가 말해볼래?”
“그… 가령, 플로라몬의 알러지 샤워로 쥬드몬의 눈을 가린 후에, 지형지물을 사용해 몸을 숨겨가며 쥬드몬을 부상자들로부터 먼 곳으로 유인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걸로 충분할까? 당화가 추가 의견을 덧붙여봐.”
“그 다음에는… 시험 상황이라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못했지만, 만약 실전이었다면 다른 인원들에게 상황을 전파하고, 지원을 요청했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단단하고 차갑던 교관의 목소리가 옅은 한숨과 함께 한층 부드럽게 풀린다.
“자, 먼저 말해두자면 평가는 쥬드몬 등장 이전까지만으로 한다. 갑자기 시험범위가 추가되는 건 불합리한 처사겠지? 파트너와의 합, 테이머 간의 합이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고, 갑작스러운 매복에 대처하는 방법도 모범적이었다. 당화가 중간에 잠깐 쉬라몬의 컨트롤을 놓친 건 감점 요인이 되겠지만, 그 말 안 듣는 녀석이랑 이 정도까지 하게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는 걸 교관들이 다 안다. 많이는 안 깎을 거야.”
패드에 펜으로 평가 내용을 적어내려가며 교관은 말을 잇는다.
“쥬드몬을 넣은 건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려고 한 건데… 솔직히 말하면, 마지막 조였던 너희들의 대응이 가장 무모했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맞서거나 따돌리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협력하려고 했는데 말이지. 그렇게 가만히 서있는 조는 선배들 중에서도 없었어. 뭐어, 개인적으로 그런 기백을 싫어하진 않아. 용기는 가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니까. 하지만! 종이 한 장 차이인 용기와 만용을 혼동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점은 명심하도록. 알겠지?”
결국 잘한 것과 못한 것이 플러스 마이너스 0점이 된 것 같은 평가에 두 사람은 어깨가 축 늘어지다가도…
“이걸로 피드백도 끝, 퇴실해도 좋아. 점수는 내일 오전쯤… 아, 그리고 두 사람. 나갈 땐 손은 꼭 놓고 나가라. 누가 보겠다.”
“… … …”
얼마나 오래 잡고 있었는지, 땀이 방울방울 흘러내릴 정도로 축축한 손을 겨우 서로에게서 떼어낸 두 사람의 동공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세차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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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으로 나오자 오후의 햇살이 무덥다.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타 자연스럽게 2인용 좌석에 나란히 앉는다. 창밖을 내다보면 방학의 시작을 축하하는 것처럼 짙은 녹색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날려 하늘거린다. 완연한 여름. 당화가 이번 학기도 무사히 넘겼다는 후련함에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있다면, 코레는 아직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아직도 시험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시험은 그럴 수 있지만, 실전에서 똑같은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하고요.”
코레의 머릿속이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것 같아서 당화는 쓰게 웃는다.
“실전에서는 우리도 완전체로 대응할 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치만…”
“자책만 하기보다는, 발전한 점을 생각해보면서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필요해요.”
당화가 살짝 단호하게 말해주면, 코레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잠시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한결 밝아진 얼굴이 된다.
“…사실 해독 프로그램은 그동안 연습하면서도 실수가 많았거든요, 이번에도 에러가 날 뻔했는데, 침착하게 한 번에 성공시켜서 뿌듯해요.”
“봐요, 잘한 점이 있지요? 저와 쉬라몬의 팀워크도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아예 시험장에 따라오지도 않던 1학년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지…”
“아하하, 그건 맞네요. 그때 낙제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던 당화가 떠올랐어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잘한 점을 칭찬해가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꼭 잡고 있었던 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당화는 작은 손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따뜻했는지, 땀에 축축히 젖어 있었는지… 따위의 실례되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꾹 쥐면서 드문드문 나 있는 빈 자리들에 시선을 둔다.
“그런데 다들 바쁜가 봅니다. 시험이 끝나면 약속하지 않아도 다같이 버스를 타러 나오는데.”
“브리엘이랑 희철도 선약이 있다고 하네요. 아, 루이랑 크로셀은 오후에 바로 귀국한다던가요?”
“귀국은 다니엘도요. 셋 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어른이 되니 다들 나름의 취미나 일정이 생겨서 예전처럼 와글와글하게 몰려다닐 수만은 없게 된다. 그리고 학교에서 함께 지낼 때는 쉬이 잊어버리고 마는 사실이지만, 동기 중 몇몇은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거대 기업들의 후계자라던가 해서, 벌써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바쁘게 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사 부부의 딸인 코레나, 어부의 손자인 당화. 그야말로 소시민 중의 소시민인 두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크고 무거운 책임이길래 방학을 만끽할 새도 없이 돌아가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코레는 살짝 수심에 잠긴 표정이 된다.
“다들 나이를 먹으니 예전같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금 쓸쓸해지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코레도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저도요? 저는 어디가 달라졌는데요?”
언제 상념에 젖어있었냐는 듯 코레가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바라보자,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먼저 말을 꺼내놓은 주제에 당화는 당황해서 그럴싸한 말들을 골라내느라 눈을 데구르르 굴린다.
“음… 열아홉 살이고,”
“나이는 누구나 공평하게 먹는 거잖아요, 당화도 스물한 살이고! 그리고 생일 아직 안 지나서 열여덟이에요.”
한국에서는 1월 1일이면 한 살이지만 그리스인인 코레가 선화 같은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 될 일은 이번 생엔 없을 테고.
“키가 많이 컸습니다.”
그 말에는 조금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는 코레. 실제로 입학했을 때보다 6센티 정도는 커서 동기 여학생 중에서는 제법 큰 축에 든다.
“전반적으로 자신감도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 보여요?”
“그럼요, 예전에는 누가 말만 걸어도 새끼고양이처럼 머리카락이 다 곤두섰는데.”
“뭐예요, 그 표현은!”
“또… 어려워하던 공부도 이제는 굉장히 잘하게 됐고.”
“후후후, 그건 당화가 같이 해줘서 그래요. 서로 가르치고 배워가면서 공부하는 게 굉장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실제로 코레는 흡수한 지식을 가르치기에 좋은 형태로 정제하는 데 수준급이어서, 괜히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고 당화도 늘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넘긴 시험이 몇 개인지를 생각하면서 잠깐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당화는…
“또 뭐 없어요?”
차창 밖의 풍경이 바뀌면서 흘러들어온 말간 햇빛이 두꺼운 안경 렌즈를 투명하게 닦아낸다. 생기 넘치게 반짝이는 싱그러운 잔디 빛 눈동자. 그 안에 담겨 있는 게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 당화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만다. 머릿속에서 다듬고 있던 문장들을 단어로, 음절로, 더이상 읽을 수 없는 것들로 해체해버리고 마는, 그럴 의도라곤 전혀 없어 사람을 더욱 난처하게 만드는 순진무구한 시선.
“…글쎄요, 더는 안 나오는데.”
“에이, 더 칭찬해봐요, 응?”
풀어졌던 자음과 모음이 제멋대로 엉겨붙어 만들어낸, ‘당신 더 예뻐졌네요’ 라는 말을 당화는 끝내 내뱉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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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려 번화가 사이로 조금만 걸어가면, 흰색 바탕에 파란 줄무늬로 장식된 나무 간판을 금방 찾을 수 있다. 재작년 즈음, 한동안 입맛이 없다며 힘들어하던 코레를 위해 동기들이 다같이 발품을 팔아 찾아낸 식당이다. 메뉴는 물론 코레의 향수병을 달래줄 수 있는 그리스 전통 요리. 한 입 먹자마자 눈물이 핑 돌고 코를 훌쩍이기 시작한 코레를 보며 모두가 환호하던, 우습고도 찡한 기억이 이곳에는 있다.
쨍한 흰색으로 칠해 시원해 보이는 나무 테이블에 앉으면 풍채 좋은 식당 주인이 걸어나와 당화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코레에게 말을 건다.
“Χρόνια και ζαμάνια, Κόρη! Πως τα πας στο σχολειο σου?”
“Χαίρετε. Μόλις τελείωσα τις εξετάσεις μου.”
무척 반가워하는 투의 주인은 당화를 곁눈질하더니, 히죽 웃으며 코레에게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
“Είναι το αγόρι σου?”
당화가 조금만 더 섬세했더라면 코레의 표정이 미묘해지고 대답하는 어조가 조금 높아졌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고, 붙임성이라도 좋았더라면 길거리를 지나가는 자동차와 행인들을 보는 대신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넉살 좋게 물어봤겠지만, 유감스럽다고 해야 할지 당화는 둘 중 어느 하나에도 해당되지 않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주인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당화가 고개를 돌리면, 코레는 메뉴판을 높이 들어 얼굴에 바짝 붙인 채로 가만히 있는 채다.
“뭐가 좋겠어요? 배 많이 고파요?”
“그렇게 들고 있으면 볼 수가 없어요.”
움찔 하더니 메뉴판을 밀어주고 코레는 물잔을 들어 한 잔을 다 비운다. 여름이니 갑자기 더위가 치밀어오르는 일도 있지, 하며 당화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메뉴판의 삼 분지 일 정도를 주문한다.
“당화는 오늘 뭐가 하고 싶어요?”
“저는 옷을 좀 사야 할 듯한데…”
옷이 또 작아졌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자 코레는 그럴 것 같다는 눈으로 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화는 괜히 머쓱해져서 어깨 부근이 조금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교복 반팔 셔츠의 매무새를 정리한다.
아르콘테스에 온 이후로 당화는 줄곧 일과 후 체력단련실에서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일로 단련된 근육이 붙어 있기야 했지만 딱히 겉으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던 몸은, 4학년이 된 지금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다고 여길 정도로 운동의 성과를 내보이게 된 상태다.
“다들 쑥쑥 자라긴 해도, 당화만큼 교복을 많이 바꿔입은 사람은 없을 걸요.”
“…그렇죠.”
“귀여운 여름옷으로 골라 줄게요. 뭐가 좋으려나?”
빙글빙글 웃으며 시선으로 온갖 상상의 옷을 입혀보는 코레.
“코레는 서점에 가야지요?”
“응! 시험 끝날 때까지 책을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오늘은 꼭 밤새 읽을 거예요.”
“링고 말로는 코레는 열한 시 이후로 깨어있는 법이 없다던데요.”
“…아니거든요? 맘만 먹으면 새벽까지도 너끈해요.”
그런 것치고는 새해맞이를 할 때 한 번도 당신을 본 적 없다, 밤에 영화를 볼 때도 중간부터 동그래져서 꾸벅꾸벅하는 거 다 봤다, 같은 유치한 이야기로 가볍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면 가벼운 요리 몇 가지가 먼저 테이블에 놓인다.
당화는 서두르지 않고 샐러드부터 조금 덜어 앞접시에 놓는다. 포크로 솜씨 좋게 정리한 샐러드를 천천히 씹으면, 신선하고 물기 많은 오이와 토마토의 단맛, 산양유로 만든 치즈의 녹진한 풍미가 입을 즐겁게 한다. 오히려 무엇을 가장 먼저 먹을지 난처해하던 코레는 고민 끝에 바삭한 오징어 튀김을 입에 쏙 집어넣고, 잠깐이지만 예전처럼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렇게 맛있어요?”
“잠깐 고향 다녀왔어요.”
차근차근 음식을 맛보던 당화는 문득 식사가 예전보다 훨씬 즐거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코레를 보며 식사 본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언제나 품에 한아름씩 안고 다니던 간식들에 당화의 일관된 취향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헛헛한 속을 무엇으로든 채워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품에 쌓아놓았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화의 식사는 일을 하기 위해 먹으면 힘이 나는 것을 위에 넣어놓는 행위였을 뿐, 음식 그 자체를 즐기거나, 음식을 나눔으로써 사람과의 유대를 쌓아간다는 중요한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를 비로소 배울 수 있었던 건 팔 할이 코레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테다. 소처럼 느리게 우물거리며 공부를 할 때처럼 식사에도 집중해서 임하는 코레는, 본의는 아니었을지언정 그 성정만으로 당화를 스스로 배우게 했다. 그릇에 담긴 걸 전부 삼키고 멀뚱히 앉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앞에 앉은 사람과 이 모든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당화는 서두르지 않고 음식을 씹는 법, 맛을 음미하는 법, 식사 사이에 소소한 대화를 이어가는 법도 터득할 수 있었다.
“왜 그렇게 웃을락말락 한 얼굴을 해요?”
“…그냥, 꼬치구이가 맛있어서.”
그런 걸 일일이 말하는 건 쑥쓰러우니까. 당화는 천천히 먹으려던 양고기 꼬치 하나를 깔끔한 솜씨로 입에 전부 집어넣는다. 천천히 먹을 수 있다고 한 번에 가공할 양의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 기인의 솜씨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입을 와앙 벌려 따라해보려다가 겨우 고기 하나를 입에 넣고 마는 코레가 우스워서 당화는 결국 낄낄 소리를 내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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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화한테 옷을 산다는 건 대형 할인 매장에서 적당히 입을 수 있는 옷을 산다는 이야기지만, 코레는 그렇게 대충 넘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너무 싼 옷은 금방 못 입게 되니 적당한 가격대의 좋은 옷을 사서 오래 입는 게 좋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두 시간 정도 번화가 곳곳에 숨어있는 옷가게들을 전부 들쑤시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
쇼핑백을 잔뜩 들고 코레 뒤를 지친 걸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맞은편에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바닥에 주저앉아 집에 가자는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더운 날 산책을 오래 해서 기운이 다 빠졌는지 혀를 빼물고 금방이라도 드러누울 기세이던 개가 별안간 그 심정 나도 알지, 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봐서 당화는 얼떨결에 동물과의 깊은 교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다.
“당화는 세미 정장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단정한 정장 느낌이면서도, 너무 격식 차리지 않고 편안해 보이는 스타일이요. 제가 매번 골라줄 수는 없으니 앞으로도 이런 느낌으로 옷을 고르면 실패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뿌듯한 표정으로 재잘거리는 코레도 쇼핑백을 두어 개 들고 있다. 쇼핑백 속에 든 옷을 생각하면 당화는 심장이 너울치는 파도 속에 표류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기분을 맛본다. 허리 부근에 묶은 것처럼 매듭이 지어져 있는 라임색의 짧은 반소매 상의에, 심플한 흰색 긴 치마와 같은 색의 여름용 샌들을 신은 코레는 딱히 지금까지의 옷 취향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시도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어서 당화는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흐릿한 어지러움에 시달려야 한다.
조금씩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걷다 보면 골동품점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의 작은 가게에 도착한다. 간판에 책이 그려져 있지 않았다면 아무도 서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그런 곳이다. 쇼핑몰 안에 있는 대형 서점에 갈 때도 있지만, 코레는 사야 할 책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면 이곳에 와서 말수가 적고 행동거지가 침착한 주인이 추천해주는 책을 사는 걸 더 좋아한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면 각자 향긋하게 우린 차 한 잔과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다. 사지도 않은 책을 읽도록 해주는 이 별난 서점 주인은 사실 대단한 장사꾼이다. 이곳에서 추천받은 책이 두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절대 빈손으로 나서는 일도 없었으니까.
먼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을 집어들면, 당화는 작게 감탄하는 소리를 낸다. 파도 사진을 표지로 한 시집, 그것도 한국어로 된 책이다. 요즘 세상에 외국 책을 구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겠지만, 주인의 성정을 닮아 고요하기 그지없는 이 서점에서 출신을 짐작하게 할 만한 이야기는 코레에게 하는 귓속말로도 꺼낸 적이 없는데도. 저 눈썰미와 장사 수완에는 못 당하겠다고 생각하며 당화는 책을 펼친다.
코레와 함께 오랫동안 독서를 하며 알게 된 점이 하나 있다면, 시를 읽는 건 차를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그러하냐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을 읽는 것은 차의 첫인상을 알기 위해 향을 들이마시는 것과 비슷하고, 한 행을 읽고 다음 행을 읽기까지의 짧은 공백은 입 안에 머금은 한 모금 찻물을 음미하고 목으로 넘기기까지의 시간과 거의 같다. 시어의 의미를 찾아내느라 고심하는 것은 찻잔 속에 고인 농밀하고 변화무쌍한 향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과 다를 바 없고, 마지막 여운은 다 읽은 후에도, 다 마신 후에도 묵직하게 가슴에 남아 오랜 시간 맴돈다.
극도로 정제된 활자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고양감에 가볍게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던 당화는 책이 아니라 자기를 보며 눈을 휘어 웃고 있는 코레와 눈이 마주친다.
“그렇게 맘에 들어요? 어떤 시인데요?”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을 하고 있는 코레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읽어줄까요?” 하고 운을 띄워 본다.
물론 정답이다.
“전부 한글인데도…”
“괜찮아요. 당화 목소리를 잘 들으면 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거든요.”
나는 다시 바다로 가련다. 그 호젓한 바다 그 하늘로.
섬을 떠나 학교로 올 때 했던 생각과 비슷한 것 같지만, 지금의 자신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내용인 것 같아서 당화는 페이지를 넘긴다.
바다는 엄마처럼 가슴이 넓습니다.
신선한 울림을 주지 못하는 표현.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정말로?”
“쑥쓰러워요? 그럼 안 읽어줘도 되지만…”
저렇게 눈썹만 추욱 늘어트리면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당화는 괜시리 제 볼과 입꼬리를 누르다가, 큼큼 하고 헛기침도 해보고, 책을 쥔 손을 꿈지럭거리다가, 더는 도망갈 곳이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숨을 들이마신다.
푸른 잉크로 시를 쓰듯
백사장의 깃은 물결에 젖었다.
여기서는 바람은 나푸킨처럼 목에 걸었다.
여기서는 발이 손보다 희고
게는 옆으로 걸었다.
멀리 이는 파도-- 바다의 쟈스민은 피었다 지고,
(여기서 코레가 조금 웃는 소리가 났다.)
흑조빛 밤이 덮이면
천막이 열린 편으로
유성들은 시민과 같이 자주 지나갔다.
별들은 하나하나 천년의 모래 앞에 씻기운
천리 밖의 보석들……
바다에 와서야
바다는 물의 육체만이 아님을 알았다.
뭍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파도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내 꿈의 수평선을 머얼리 그어 둘 테다!
나는 이윽고 푸른 바다에 젖는 손수건이 되어
뭍으로 돌아왔다.
(김현승, 「바다의 육체」)
…낭독이 끝나자 코레는 감았던 눈을 뜬다. 시의 내용을 이해한 것은 아닐 텐데, 그럼에도 무언가 얻었다는 표정인 것은 왜일까?
“왜 이 시를 골랐어요?”
어떤 시였냐고 묻지 않고, 왜 골랐냐고 묻는 건 조금 엉뚱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보다 현명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뭍으로 돌아온다는 표현이 있었어요. 그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코레는 고개를 끄덕이지만, 만족한 눈치는 아니다. 당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어간다.
“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살았지만, 이젠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걸 아니까요.”
“… … …”
“바다는 부모를 대신해서 제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아이도 영원히 부모 품에 머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무섭고 힘들어도 떨어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열심히 노력한 끝에, 제 모든 것이라 여겼던 바다를 이제는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파도에서 배운 춤을 일깨우고, 꿈의 수평선을 긋는다. 바다가 가르쳐준 모든 것은, 뭍으로 돌아온 지금도 당화의 온몸을 적시고 있다.
제 책을 꾹 쥐고 있던 코레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스르르, 책은 점점 기울어져서 이윽고 테이블 위에 소리없이 떨어진다. 코레는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웃어보인다.
“당화도 정말 많이 달라졌네요.”
“쓸쓸한가요?”
“그렇기도 한데, 기쁜 마음이 더 커요. 성장하는 모습에는 감동이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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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공원에서는 일곱 빛깔로 반짝이는 오다이바의 명물 레인보우 브릿지가 잘 보인다. 당화는 오늘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쪼그려앉아 흰 모래를 손으로 푹 퍼올린다. 손가락 사이로 기분 좋을 만큼 까끌까끌한 진짜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다.
“이번 여름방학엔 뭘 할 거예요?”
모래 위에 살포시 앉아 풍경을 눈에 담던 코레가 그렇게 묻는 순간, 당화는 한 심상(心象)을 떠올린다.
병원 냄새. 소독약의 찌르는 듯한 그것이 아니라, 고단한 삶, 꺼져가는 삶에게서만 풍기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냄새가 있다. 방학을 맞아 돌아갈 때마다 점점 진해지는 그런.
“할아버지 돌봐 드려야죠.”
당화는, 할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는다. 코레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고 흉금을 기탄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내어 구태여 괴롭게 할 필요는 없다. 이미 한 번 그렇게 한 걸 후회하고 있고, 거기에 지금,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슬픔을 느끼고 있지 않다.
당신께서 들으시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지만, 당화는 제 유일한 혈육과 함께 있어도 늘 혼자였고, 그렇기에 머지않아 물리적으로 혼자가 될 것이란 사실은 몇 날 며칠을 목놓아 울고 평생을 아파하며 견뎌야 할 만큼 거대한 감정의 격랑으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그저 바닷물을 코로 마신 것처럼 미묘하게 따끔거리는 불편함만이 남을 것이다.
“머리 스타일을 바꿔볼까요.”
“머리요?”
“조금 더 멋있게 다듬어볼까 하고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는… 안경을 바꿀까 고민 중이에요.”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머리 바꾸면 사진 보내줘야 해요?”
떠나기 전 당화는 파도가 치는 곳을 힐끗 돌아본다. 바닷물에 손이라도 담글까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오늘은 그럴 날이 아니다.
내일이면 당화가 먼저 귀국길에 오르고, 모레에는 코레도 집으로 돌아간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몰라보게 변한 것들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이곳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